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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Mar 24. 2016

사기꾼들 : 에콰도르-페루 국경

여행자. 사기꾼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다시 못 만날지 모르니 하루치 인사를 미리 해두죠.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 영화, '트루먼 쇼'.

  에콰도르에서의 휴식은 끝났다. 산 위로 피어오르는 몽실몽실한 구름. 그것이 키토의 마지막 풍경이었다. 오후 7시, 국경도시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키토에서 에콰도르 남쪽의 국경 도시 후아킬라스(Huaquillas)까지는 버스로 11시간. 종착지는 페루의 수도 '리마(Lima)'였다. 이 또한 긴 여정이 될 터였다. 키토에서 국경까지 약 900km 그곳에서부터 리마까지 약 1300km.  온전히 길을 달린다 해도 부담스러운 거리다. 최소한 세 번은 차를 바꿔타야 하고, 출입국 수속을 밟아야 하며 환전도 해야 한다. 혼자 국경을 넘는 여행자. 사기꾼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 에콰도르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바라본 구름(왼쪽)과 내 옆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던 아이(오른쪽)



   장소 : 에콰도르 - 페루 국경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잠에서 어설피 깨어 사람들을 따라갔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를 이제 막 지나고 있다. 길 건너 사람들이 향해 가는 곳에 있는 건물. 에콰도르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그제야 생각났다.

  후아킬라스의 국경 사무소는 국경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버스를 이용해 국경을 넘을 경우 국경에서 5km 떨어진 국경 사무소에 내려서 출국 스탬프를 찍고 나서 국경을 넘어야 한다. - Lonely Planet, <South America>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 모두가 졸린 표정이었다. 비몽사몽 간에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던 나는 여권을 손에 든 채 사람들 뒤에 줄을 섰다.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와 '가방(Bag)'을 가져오라고 했다. 무슨 소린지. 그는 다짜고짜 내게 버스에 실어 놓은 내 배낭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왜? 아무도 가방을 가지고 내린 사람이 없잖아."
  "너는 외국인이잖아. 가방을 가져와."
  "외국인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나만 가방을 가져와야 되지?"
  "가방을 가져와야 도장을 찍을 수 있어. 어서 가져와."

  그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사람들은 하나둘씩 버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내게 가방을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가 '국경 사무소의 직원'쯤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차피 내 차례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나는 가방을 가지러 다시 버스로 갔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국경에서 가방 검사를 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기에 '여기서도 가방 검사를 하려나보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내가 버스의 짐칸에서 배낭을 챙기는 사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장 찍기'를 끝내고 버스로 돌아왔다. 나는 배낭을 들고 국경 사무소 앞으로 가서 출국 도장을 찍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랍쇼-


  여권에 출국 도장을 찍고 있던 그 순간, 길 건너 저편에서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는 점점 멀어져 갔다. 이 상황은 뭘까. 나는 멍하니 버스가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당혹스러웠다. 버스 운전기사는 내가 배낭을 챙겨 버스에서 내린 것을 보고 다시 버스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국경까지는 5km나 더 가야했다. 허탈한 마음으로 버스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걸어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게 가방을 가져오라던 남자가 나타났다.


  "헤이, 어떡해? 택시 타고 가야겠네. 내 차(택시) 타고 국경까지 가는 게 어때?"
  "뭐? 이게 지금 장난 하나." 

  그는 길 한쪽에 세워져 있는 차를 가리켰다. 아, 이 녀석한테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사람들이 '큰 가방'을 가지고 내리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정작 국경 사무소의 (진짜)직원은 내 배낭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야 이, 미친놈아!!"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는 "캄 다운, 캄 다운(Calm down)"이라며 손을 내저었고 자기가 국경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GET OUT!!"


  나는 근처에 세워져 있던 택시에 올랐다. 마침 동전 남은 것이 있었고 그것이면 택시비는 충분했다. 택시의 보조석에는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 둘은 친구라고 했다. 친구라고는 했지만 분위기는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국경으로 향하는 택시 안의 어색한 침묵. 그 침묵을 깨고 택시 기사가 내게 말했다. 

  "어디까지가? 리마?"
  "응, 리마."
  "리마까지 버스 타면 30달러가 넘는데, 내 차 타고 바로 리마까지 가면 좀 싸게 해 줄게. 28달러. 내 차 타고 가는게 어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택시 기사. 옆에 앉은 친구라던 남자는 아무 말이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승용차로 가는 것이 확실히 편하고 좋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제안를 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나를 위해 선행을 베풀 리가 없었다. 내가 만약 이 차를 타고 리마로 간다면 중간에 나를 위협하며 강도 행각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두 남자가 칼을 들고 나를 덥친다면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싫다"라고 하면 갑자기 차를 세우고 두 남자가 나를 덮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했다. 나는 선뜻 '싫다 좋다'를 말할 수 없었다. 


  "알겠어. 한 번 생각해 볼게. 일단 국경 마을에 세워줘. 뭘 좀 먹어야겠어"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들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함께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들 손에서 벗어나서 국경을 넘어가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재빨리 국경으로 향했다. 국경 근처에는 곳곳에 경찰들이 서 있었다. 국경을 넘으려 하자 환전상들이 내 주위에 몰려들었고 서로 자신에게서 환전을 하라고 말했다. 페루로 넘어가서 당장 버스 티켓을 끊으려면 약간의 돈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40달러를 환전했다. 국경 환전상들의 최악 환율. 날강도들. 100 솔(Sol, 페루의 화폐 단위)도 안 되는 돈을 내게 줘어줬다. 

  에콰도르에서 페루로 넘어갈 때 '환전 사기'를 주의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경 근처에는 여행자들에게서 한 몫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흔한 부류가 환전상이라 했다. 환전상들은 여행자들에게 '위조지폐'를 건네준다고 했다. 나는 환전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경찰이 서 있는 곳으로 갔고 그곳에서 환전을 했다. 

  '경찰이 바로 옆에 있는데 설마 사기를 치겠어?'


  하나 둘 씩 차근차근 일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국경을 넘는 첫 번쨰 동양인이어서 그랬던 걸까. 뭔가를 할 때마다 누군가가 끼어든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큰 사건이 하나 터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국경을 넘어 릭샤(마차와 비슷한 탈것. 말이 끄는 자리에 오토바이나 자전거가 있다)에 올랐다. 페루로 넘어온 뒤에는 국경 마을의 시장 구경도 할 겸 천천히 걸어 국경 사무소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페루 경찰 하나가 내 앞길을 막아서면서 무조건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아침부터 누가 나를 해치겠냐고 했지만 경찰은 절대 보내줄 수 없다며 어깃장을 놓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릭샤'에 올라 국경 사무소로 향했다.

  국경 사무소에 도착해서 입국 카드를 작성하려는데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와서 묻는다.

  "꼬레아노?"
  "요 소이 꼬레아노(Yo soy Coreano. 한국 사람이야)"


  누더기 셔츠를 입은 남자. 그는 국경 사무소 관계자가 아님이 확실했다. 그는 입국 카드를 자신이 작성해 주겠다며 내 손에서 입국 카드와 여권을 빼앗아 빈칸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뻔한 수작이다. 입국 카드를 작성하고 돈을 달라고 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여권을 빼앗았다. 그러면서 저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다시 자기가 적어주겠다며 내 옆에 달라붙는다. 끈질기다. 나는 'No Money'라고 했다. 그는 내 말에 아랑곳 않고 입국 카드를 작성했다. 글자 몇 자 적어주고 돈을 요구하려는 게 분명하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여러 사람과 실랑이를 벌여왔던 터라 이제는 말싸움하는 것도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는 입국 카드와 여권을 건네주며 돈을 달라고 했다. 저리 가라고. 나는 인상을 쓰며 귀찮게 하지 말고 가라고 했다. 그는 중얼거리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뭐지, 왜 아무도 없는 거지?'

  입국 카드를 들고 입국 심사를 하는 곳으로 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 안쪽을 살펴보니 직원은 사무실 안쪽에 마련된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 나는 그녀를 깨웠다. 지난밤 당직이었을 그녀는 많이 피곤했는지 내가 아주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매섭게 노려봤다. 내가 여권을 내밀자 도장을 찍어줄 생각은 않고 여권을 천천히 살핀다. 첫 장, 사진을 유심히 보더니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다. 아직 정신이 맑지 않은 듯, 물 밖에 나온지 한참 된 생선의 눈처럼 그녀의 눈에서는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여권을 천천히 넘겨가며 다른 나라의 출입국 스탬프와 비자를 구경한다. 도장 한 번 받기가 이리도 힘들었던가. 여권 구경을 끝내고도 한참을 뜸을 들이고 나서야 그녀는 도장을 찍어준다. 

  "꼬레아노."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한 마디였다.


※ 페루 국경 사무소에서 툼베스로 가는 길(왼쪽) / 툼베스 시내 번화가. 사람들이 그늘에 모여 있다.


   밖으로 나선 나는 큰 길가로 가서 지나가는 콜렉티보를 세웠다. "툼베스, 툼베스(Tumbes)" 택시 기사들이 손을 흔들며 자신의 차를 타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콜렉티보에 올랐다. 콜렉티보의 찢어진 인조가죽 시트. 택시 기사를 믿느니 찢어진 의자에 앉아서 가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콜렉티보는 툼베스로 향해 달렸다.

  나는 툼베스에서 리마로 가는 버스 티켓을 사기 위해 버스 회사를 찾아다녔다. 페루에서는 버스표를 정류장의 창구에서 파는 것이 아니라 버스 회사 사무실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제일 싼 표를 구하기 위해 몇 군데 회사에 들렀고 한 시간 뒤에 출발하는 버스를 사려했다. 표를 구입하기기 위해 환전한 돈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창구 직원이 다른 돈을 달라고 하며 말했다. 

"Fake money, fake"


  뭐라고? 페이크라고?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왜 이 돈이 안 되는 건데? 그러자 창구 직원은 다른 돈 한 장과 내가 준 돈을 나란히 보여주며 말했다. 

  "이것 봐. 이건 돈이 아니야. 그냥 종이라고 종이. 위조지폐야."

 

※ 위쪽이 위조지폐, 아래쪽이 진짜 돈. 처음 페루 돈을 접해보는 사람이라면 속을 지도..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위조지폐를 내게 건네며 웃었다.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버려"라고 가볍게 말했다. 50 솔 짜리(약 17000원) 위조지폐를 보고도 그냥 웃어 넘기다니. 나는 국경에서 속고 왔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있는데 그녀는 이 상황이 웃긴가보다. 얼마나 많은 위조지폐가 여행자들을 괴롭혔을까. 그녀는 위조지폐를 한 두 번 본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달러로 표값을 치렀고 어렵사리 리마로 향하는 버스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기나긴 하루였다. 에콰도르 국경 사무소에 도착한 시간이 아침 6시가 조금 지났을 때인데 벌써 12시가 넘어 있었다. 30km정도 되는 거리를 오는 데 6시간이나 걸리다니.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페루였지만 시작부터 한바탕 고역을 치렀다. 하지만 페루의 악몽은 이제 시작이었다.  

 

※  페루의 상징 '잉카 콜라'와 코카콜라를 권하는 아주머니. 콜라는 나의 생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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