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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Mar 26. 2016

고산병, 마추픽추를 위한 통과의례 : 페루 쿠스코

그녀는 전형적인 고산병 증세를 경험했다.

나의 최상의 기쁨은 험악한 산을 기어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잿빛 구름 사이로 이따금씩 햇살이 나왔다가 금세 사라져버리는 리마의 날씨. 간간이 부는 바람은 물기와 매연을 가득 머금고 피부에 와 닿았다. 나는 리마 우중충함을 뒤로한 채 '남미 여행의 정수(精髓)'라 불리는 마추픽추(Machu Picchu)를 향해 한 발짝 더 다가섰다.

  페루 쿠스코(Cusco). 마추픽추로 향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머무는 곳이다. 바닷가에 접해있는 리마에서부터 평균 해발고도 3600m에 달하는 쿠스코까지는 버스로 약 26시간. 버스는 빙글빙글 놓여 있는 산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구름을 뚫고 올라선 뒤에도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0 장소 : 페루 쿠스코.


  버스가 산길로 접어들었을 때 잠이 든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오전 5시가 지나고 있었다. 이제 버스에서 10시간 이상 앉아 있는 것은 내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안데스 산맥의 중간쯤이었을까. 버스는 잠시 멈추었고 사람들은 간단한 음식으로 허기를 채웠다. 얼마나 많이 올라온 걸까. 제법 쌀쌀했다. 휴게소를 떠난 버스는 계속해서 산 위를 향해 나아갔다.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 하지만 그 끝에는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가 있을 것이다.


※ 쿠스코로 향하는 길에 들렀던 휴게소. 산 중턱에 있는 이곳에는 구름이 손에 잡힐 듯 하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그 끝은 있는 법이다. 버스는 천천히 그렇지만 계속해서 위로 올랐고 결국 쿠스코 버스터미널에 나를 내려놓았다. 쿠스코의 날씨는 쾌청했다. 그토록 오고 싶어 하던 곳에 왔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동안의 버스 이동으로 인한 피로를 잊게 해 주었다.


  사람들은 쿠스코의 고산병에 대해서 종종 말하곤 했다. 쿠스코에서 고산병 때문에 고생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심지어는 고산병 증세에 시달리다 못해 마추픽추로 향하는 것을 포기하고 리마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그 정도 쯤이야. 나는 충분히 쿠스코의 고산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네팔에 다녀온 적이 있었고 콜롬비아의 보고타(2600m)와 에콰도르의 키토(2800m)를 거쳐온 사람 아닌가.


  호스텔로 향하는 길은 힘들었다. 호스텔들이 모여 있는 동네는 쿠스코에서도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고 내가 가려고 한 숙소는 그 중에서도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언덕을 지나면 또 언덕이 있고 계단을 오르면 또 계단이 나왔다. 호스텔로 향하면서 이렇게 숨을 헐떡이기는 처음이었다. 숙소가 원망스럽기까지했다. 다른 곳에도 숙소는 많은데 굳이 내가 그곳에 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몸뚱어리 만한 배낭을 메고 양 손으로 큰 악기를 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모습. 누가 봐도 안쓰러워할 행색이었다.

※ 호스텔로 올라가는 마지막 난관. 마지막 언덕의 저 위에 내가 묵을 숙소가 있었다. 최고난이도의 언덕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절망이란! 그렇지만 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벽에 그려진 배낭여행자의 우스꽝스런 모습이 딱 나의 모습이었다.


  힙겹게 도착한 숙소. 체크인을 하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가방을 내려놓자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직 날이 밝은 데 지금 잘 순 없어'라는 생각을 했지만 내 몸은 그게 아니었다. 긴장이 풀린걸까.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유 없는 두통이었다. 아스피린을 먹었지만 머리는 점점 더 아파올 뿐이었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잠을 택한 것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니 주위는 어둠에 둘러 싸여 있다. 창문 틈 사이로 주황색의 가로등 불빛이 비집고 들어와 내 눈을 자극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8시가 막 지났다. 밤이 늦지는 않았다. 두통은 아까 전보다 덜했지만 정신은 아직 몽롱했다. 뭘 좀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호스텔 안쪽에 있는 바(Bar)로 향했다. 바에 가니 내가 잠들기 전에 같은 방에서 봤던 친구가 인사를 한다. 나도 그에게 인사를 하고 카운터에서 맥주 한 병을 받아 그와 합석했다.


  쿠스코에 도착하자마자 먹은 게 맥주라니.  그런데 이상하다. 맥주를 받아들이는 나의 몸이 평소와는 좀 다르다. 피로 때문일까. 내 심장은 마치 오래 달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점점 빨리 쿵쾅대기 시작했고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맥주를 마시던 나는 바람을 좀 쐬고 와야겠다고 말한 뒤 바를 나섰다.

  아직 피로가 덜 풀린 걸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호스텔의 정원을 가로질러 방으로 향하는 길. 방 앞에 검은 머리의 동양인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의 곁을 지날 때 슬쩍 웃어 보이며 인사를 했다.

  "하이-"


  어라, 한국인인가? 방으로 들어갔던 나는 다시 나와 그녀에게 물었다.

  "웨얼 아유 프롬?"
  "코리아. 웨얼 아유 프롬?"
  "아, 한국인이세요? 반가워요. "

   그녀는 내가 호주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 여행자이자 처음 만난 동양인 여자 여행자였다. 보름만에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온 한국말. 그동안 어항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맥없이 구르던 혀는 오랜만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그녀는 쿠스코에 온 지 3일이 되었다고 했다. 고산병 약을 챙겨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쿠스코에서 이틀 동안 어지럼증에 시달리며 화장실 변기통을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삼일째가 되는 오늘에서야 겨우 정신이 좀 들었고 이제는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전형적인 고산병 증세를 경험한 것이라고 했다.

  "제가 체력이 강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고산병 앞에서는 약도 없네요. 고산병 증세 없으세요?"
  "머리가 조금 아프긴 한데 이게 고산병 증센가요?"


  그녀는 오늘 새벽, 그러니까 몇 시간 후에 마추픽추로 떠난다고 했다. 마추픽추로 떠나기 전에 몸이 진정되어서 다행이라는 그녀는 마추픽추에 들렀다가 바로 볼리비아 '라파스(La Paz)'로 간다고 했다. 오늘이 이곳 쿠스코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아쉽네요. 전 오늘 낮에 도착했는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와인 한 잔 할래요?"
  "와인이요? 좋죠. 그런데 와인은 어디서 났어요?"
  "배낭에 와인을 넣고 다니면서 가끔 혼자 마셔요. 하하."


  내 배낭에는 와인이 있었다. 호주 서남부의 '도넬리 리버 와인 농장'에서 일 할 때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창고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창고에는 와인이 담겨있는 오크통들이 놓여 있었고 그 안쪽에서 와인병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언제 담갔는지 얼마나 오래된 됐는지도 모를,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라벨조차 붙어 있지 않던 와인 몇 병을을 창고에서 꺼내왔다. 일부는 농장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마셨고 여행을 하면서 마시려고 두 병을 배낭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우리는 바에서 와인을 마셨다. 홀짝홀짝. 그녀는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남미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라 했다. 캐나다 벤쿠버에서 비행기를 타고 페루 리마로 왔고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 쿠스코로 온 것이다. 그녀도 나도 산길을 따라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그녀는 라파스(La Paz)가 기대된다고 했다. 자신이 예약해 놓은 라파스의 숙소에서는 매일 밤 파티가 열린다고 했다. 나도 라파스에 갈 거라는 말에 그녀는 내게 숙소 이름을 말해주며 아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모르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라파스에 갈 예정이지만 그곳에 언제 도착하게 될 지는 몰랐다. 쿠스코에서 비자를 받아야 했고 마추픽추에 올라야 했으며 라파스로 가는 길에 푸노(Puno)에 들러 티티카카 호수(Lake Titicaca)에도 가 볼 생각이었다. 라파스의 어느 숙소로 갈지 정해놓지도 않았고 라파스에는 뭐가 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가슴을 가르며 내려가는 자줏빛 액체. 레드 와인 특유의 새큼함이 코 끝을 자극했다. 얼마나 마셨을까. 아직 반 병 정도 남아 있는 걸로 봐선 많이 마셔봐야 각자 서너 잔 밖에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숨이 가팔라왔다. 맥주를 마실 때 느껴지던 것보다 더 빠르고 격렬한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점점 더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지는 심장. 내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와 함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술을 마셨다간 심장이 폭발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나는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라파스 숙소가 어디라고 했죠?"


  그녀가 숙소 이름을 다시 한 번 말해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넣지 못했다. 그 순간 내 관심은 오로지 심장에 있엇다. 

 "여행 잘해요. 인연이 닿으면 라파스에서 볼 수 있겠죠. 굿나잇"


  그녀는 바에 남아 있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숨 쉬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내 폐기능이 마비된 걸까. 내 폐는 조금이라도 더 산소를 빨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인듯 쪼그라들었다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격렬히 움직이고 있었다. 배터리가 방전된 차에 시동을 걸듯 나는 정신을 차리기위해 필사적으로 산소를 빨아들였다. 


  '잠을 자야 해.'

  지금 잠들지 않으면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잠들어 버린다면 심장이 멎어버린 채 영원히 잠드는 것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다.


   "Are you okay?"

  도미토리의 다른 침대에 있던 여행자가 괜찮냐고 물었다. 나의 맥 빠진 숨소리.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신음. 모든 것이 살려달라는 애원처럼 들렸을 것이다. 나는 살기위해 힘겹게 산소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심장 박동수를 조금이라도 낮춰야 했다.


  "노.. 프라.. 블럼. 노 프라 블럼..."

   "노 프라블럼"이라고 말하는 나의 의식은 점점 옅어졌다. 그것이 잠이었는지 생의 끝으로 가는 과정인지 알 수 없었다. 무한의 어둠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어갔다. 아득한 어둠으로 둘러 쌓인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는 것만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대로 잠이 들면 심장 마비로 죽을지도 몰라. 잠들면 안돼"라고 누군가 말 하는 것 같았지만 의식과 무의식을 컨트롤 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블랙홀과 같은 어둠으로 나는 빨려들어갔고 의식을 잃었다.


쿠스코 시가지를 굽어 보며 잉카제국과 마추픽추를 생각한다.


  눈을 떴을 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공간. 창문 틈새로 빛이 새어들어오고 있다. 주황색의 날카로운 빛이 아닌 맑고 투명한 빛이다. 창문을 열자 투명한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기쁨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아, 나는 아직 살아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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