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C Mar 28. 2016

베이스캠프를 향해 : 페르 쿠스코

'마추픽추'만을 위해 존재하는 작은 마을,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안데스 산자락 저 위에서 쏟아져내린 햇살. 방 안을 가득 채운 햇살이 피부에 닿아 온기를 전해줄 때 느껴지던 따스함. 그 순간 나는 살아있다고 느꼈고 그것은 곧 기쁨이 되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두통은 말끔히 사라졌다. 숨을 헐떡이며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던 어제의 일이 마치 환상이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몸은 가벼웠다. 나는 쿠스코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한껏 숨을 들이켰다. 몸속으로 스미는 차가운 공기. 마추픽추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남미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던 장면을 마주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0 장소 : 페루 쿠스코 -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쿠스코에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마추픽추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었지만 마추픽추는 이제 바로 코 앞에 있으니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른 하나. 마추픽추에 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볼리비아 비자를 받아 두는 것이었다. 마추픽추로 떠나기 전 비자를 받아두어야 했다. 그래야만 국경을 무사히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쿠스코의 볼리비아 영사관에 들러 비자를 받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유용하게 쓰이는 구글맵(Google Maps)을 이용해서 '볼리비아 영사관'의 위치를 미리 파악해 둔 나는 택시를 타고 볼리비아 영사관으로 향했다. 걷기에 부담스러운 거리. 택시 기사에게 구글맵을 통해 알아낸 주소를 보여주며 'Consulado de Bolivia'로 가자고 했다.

  9시 30분이 되자마자 영사관 건물의 벨을 눌렀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기다리다가 또 한 번, 잠시 후 또 한 번. 세 번째 초인종을 누르고 나니 사람이 나왔다.

 "비자 받으러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내 이름이 불릴 때까지의 기다림.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애썼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비자를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최악의 경우를 떠올렸다. 비자를 거절당하면 남쪽 칠레로 가야 할까. 온갖 상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을 때 영사는 나를 불렀고 내게 형식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어디로 갑니까? 왜 갑니까? 뭐하러 갑니까? 언제 갈 겁니까?"


  질문이 끝난 뒤 영사는 서류를 보여달라고 했다. 볼리비아 비자를 받기 위한 서류. 여권, 황열병 예방 접종 확인서, 사진, 신용카드, 호텔 예약 확인서 그리고 다른 나라로 떠나는 비행기표와 사진 한 장. 영사는 황열병 예방 접종 확인서를 유심히 살핀 뒤 호텔 예약 확인서와 신용카드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항공권(e-ticket/출발지와 도착지가 어디든 상관이 없다. 예약 확인 내용만 보여주면 된다)'을 보여달라고 한다. 다른 나라의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을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간혹,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을 때 비싼 수수료를 내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볼리비아 비자는 수수료가 따로 있지도 않았다.

  영사는 비자 발급을 위해 여권과 서류를 챙겨 들고 2층으로 올라갔고 나는 1층에 남아 비자 신청서를 작성했다. '어느 도시로 갈 것인가요?'라는 항목에 '라파스(La Paz)'라고 적었다. 새벽에 마추픽추로 떠난다던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는 마추픽추에 들른 후 야간 버스를 타고 '라파스'로 떠난다고 했다. 나도 라파스로 갈 것이었지만 그녀와는 만나지는 못 할 것이다.


※ 구글맵을 이용해서 볼리비아 영사관(Consulado de Bolivia)을 찾았다. 여권에 한 페이지가 볼리비아 비자로 채워진 모습. 여권을 펼칠 때마다 느껴지는 뿌듯함!


  비자를 받는 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여권을 들여다보니 뿌듯함이 샘솟는다. 여권의 한 페이지가 채워진다는 것. 여행자에게 있어 여권에 새로운 도장이 찍히고, 스티커가 붙을 때의 느낌은 숙제를 끝낸 후, 칭찬받으며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보면 볼수록 기쁨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흔적이다. 영사관을 나선 나는 큰 길가에서 버스에 올라 구시가로 향했다. 이제 마추픽추로 갈 준비만 하면 된다.


※ 쿠스코는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다. 구시가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오랜 역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으며, 구시가 주변의 시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과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 먹거리들을 구입할 수도 있고, 페루 사람들의 일상을 살펴볼 수도 있다.(쿠스코의 메인 광장이라 할 수 있는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왼쪽 사진)과 구시가의 시장 풍경.


  - 마추픽추 아래,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

  페루의 변덕스러운 날씨. 어제까지만 해도 티 없이 맑고 투명하던 하늘에 오늘은 잿빛 먹구름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비가 온다고 해서 떠나지 않을 순 없다. 쿠스코에서 3일을 쉬었다. 피로는 완전히 풀렸다. 내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고 어디로든 떠나지 않으면 좀이 쑤셔 못 견딜 것 같은 그런 날이다.


  나는 쿠스코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우르밤바(Urubamba)로 떠났다. 질퍽한 거리에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털털털털. 시커먼 매연을 내뿜는 버스는 바퀴 자국을 선명히 남기며 쿠스코를 떠나 산길을 달렸다. 사람들은 큰 배낭을 짊어진 외국인에게 무관심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기에 나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우르밤바 터미널은 산속 시골 마을에 있는 버스 터미널 치고는 꽤나 큰 규모였다. 나는 우르밤바 터미널에서 오이얀따이땀보(Ollantaytambo)로 향하는 콜렉티보(승합차)에 올랐다. 승합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더러는 차에 올랐고, 더러는 차에서 내렸다. 하늘엔 여전히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고 빗방울은 창 밖을 적시고 있었다. 오이얀따이땀보까지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오이얀따이땀보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마추픽추에 오르기 위해서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로 가야 했고, 오이얀따이땀보에서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승합차가 멈춰 선 곳 주변에는 택시와 콜렉티보들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콜렉티보 기사들에게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가냐고 물었지만, 모두들 "No"라고 답했다. 택시 기사들은 자신이 데려다주겠다고 하면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다.


  '아니, 왜 택시는 가는데 콜렉티보는 안 간단 말인가?'

  나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로 가는 콜렉티보나 버스 정보를 알아볼 요량으로 여행 안내소에서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로 가는 버스에 대해 물어봤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로 가는 버스나 콜렉티보 있나요?"
  "없어요. 기차 타고 가세요."


  방법은 없었다. 걸어서 마추픽추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길을 안다면, 동행이 있다면, 걷는 것을 선택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처음부터 쿠스코에서 '마추픽추 트래킹'을 신청했더라면 걸어볼 만도 할 것 같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선택지는 두 개였다. 택시를 타든가 기차를 타든가.


  나는 기차를 선택했다. 택시를 믿을 순 없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서 택시를 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나의 뼈까지 발라먹을 것이다. 나는 기차역 매표창구로 가서 말했다.

  "마추픽추!"


  매표창구 유리창 너머에 앉아 있는 직원의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녀는 마이크에 입을 대고 열심히 말했지만, 창 밖의 스피커는 잡음만을 내보낼 뿐이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지만 나는 "티켓, 티켓"이라고 외쳤다. 그녀는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다. 창 밖의 내가 아무런 반응 없자, 그제야 그녀는 기차 시간표에 선을 그어 보여준다.

  어라, 지금 곧 출발하는 기차가 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기차가 이렇게 비싸다니. 쿠스코에서 오이얀따이땀보까지 로컬 버스를 타면서 1달러가 채 안 되는 돈을 버스비로 냈는데,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가 60달러가 넘다니. 하- 그래도 어쩌겠나. 그곳에 안 가볼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기차표를 받아 들고 경적을 울리고 있는 기차를 향해 갔다. 기차의 천창 일부가 유리로 되어 있다. 마추픽추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서비스인가. 기차는 산 골짜기 흐르는 천을 따라 천천히 달렸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페루의 산골 마을 풍경. 깊고 깊은 산 중간에 마추픽추가 있다.


  두려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두려움이 '마추픽추'를 만들었을 것이다. 구름을 뚫고 치솟아 있는 웅장한 바위들이 사방에 놓여 있다. 이 깊은 산 속, 저 높은 곳에 도시를 만들어 제국의 명맥을 유지해야 할 정도로 스페인 군대가 두려웠던 잉카 제국의 사람들. 그들은 스페인 군사들이 두려운 나머지 마추픽추로 향하는 길마저 끊어버렸다고 했지만 결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페루레일(PeruRail)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역으로 향하는 길. 깎아지르는 듯한 높은 절벽들이 곳곳에 즐비해 있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도착했다. 이곳은 마추픽추를 오르기 위한 사람들이 모이는 '베이스캠프'다. 오직, '마추픽추'만을 위해 존재하는 작은 마을. 오늘도 많은 이들이 사라진 제국의 흔적을 보기 위해 저 높은 곳, 하늘에 좀 더 가까운 저곳에 올랐을 것이다. 내일도 저곳엔 사람들로 붐빌 것이고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 되겠지.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의 하늘을 맑았다. 거칠게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눈부신 햇살. 내일도 날시가 오늘만 같아라. 햇살이 비치는 마추픽추를 보고 싶다.   


※ 산등성이 사이에 위치한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엔스. 마을은 저녁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산병, 마추픽추를 위한 통과의례 : 페루 쿠스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