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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Mar 28. 2016

마추픽추에도 비가 내린다 : 페루 마추픽추

지금은 이끼낀 진회색의 돌이 되어 버린 도시.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 알랜드 보통 <여행의 기술>

  마을의 밤은 흥겨웠다. 저 구름 위에 자리한 도시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약간은 격앙된 목소리. 필시 오늘의 경험이 그들을 격앙케 했으리라. 또 한편에서는 내일이면 마추픽추에 닿을 사람들이 기대와 흥분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나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겠지. 나는 여행자 거리의 펍(Pub)에서 맥주 한 병을 마셨다. 딱 기분 좋을 만큼만.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0 장소 : 페루 마추픽추(아구아스 칼리엔테스)


  물소리가 거칠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계곡의 물살이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어젯밤보다 격렬하다.  어제의 아구아스 갈리엔테스. 옅은 구름에 휘감긴 채 강렬한 햇살을 받아내고 있던 아구아스 갈리엔테스를 또 한 번 기대했건만 날씨는 나의 기대를 저버린 듯하다. 물살이 더 세어졌단 것은 위쪽 어딘가에 비가 내린다는 걸 의미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희뿌연 물방울들이 온 마을을 뒤덮고 있다. 햇살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나는 마을의 관광 안내소에서 마추픽추 입장 티켓을 구입한 후 셔틀버스 승강장으로 향했다. 셔틀버스는 편도 티켓만 끊었다. 마추픽추가 있다는 산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구름에 가려진 저 하늘 위까지 걸어 올라가는 건 내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걸어 내려오는 건 흥미로운 일이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을엔 드문드문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구름 위에 있다는 마추픽추엔 비가 내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지그재그로 놓인 산길. 버스는 그 위를 천천히 굴러갔다. 창 밖으로 보이는 마을은 조금씩 작아져갔고, 마을을 집어삼킬듯한 계곡의 거친 포효도 점점 멀어져갔다. 조용한 산길. 버스에 탄 사람들은 모두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낭떠러지 절벽에 매달려 아슬아슬하게 하늘 위로 올라가는 버스. 여전히 마추픽추는 구름에 가려져 있다.    


※ 마추픽추에는 야마(llama)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난간 하나 없는 낭떠러지. 저 아래엔 물이 흐른다.


  드디어 마추픽추 입구다. 길게 늘어선 줄이 끝나는 지점. 저 모퉁이만 지나면 내가 그토록 오고 싶었던 마추픽추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일주를 계획하며 손에 꼽았던 명소가 바로 인도의 타지마할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타기, 그리고 페루의 마추픽추가 아니었던가. 차례차례 사람들은 마추픽추 안으로 밀려 들어갔고, 내 순서가 오길 기다렸다.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볼 수 있었던 것은 구름이 휘감고 있는 마추픽추였다. "역시 마추픽추"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스케일. 전 세계에 수많은 명소들이 있지만, 이처럼 TV나 사진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곳은 드물 것이다. 날씨가 흐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추픽추의 위엄은 그대로 살아있었다. 나는 벅찬 감동과 흥분 속에서 마추픽추 이곳저곳을 누볐다. 계산식 도시. 한 치의 틈도 찾을 수 없는 돌로 만들어진 구조물.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절벽길. 잉카인들의 흔적이 지금은 이끼 낀 진회색의 돌이 되어버렸지만, 그 찬란함의 여운은 돌덩이 하나하나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도시'였다. 


마추픽추. 절로 감탄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풍경이다. 가히, 남미 여행의 정수라 할 만 하다.

※ 마추픽추에도 최후의 탈출로는 있었다. 스페인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탈출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죽음의 다리'. 절벽에 걸쳐진 좁은 길에 나무를 놓아두고 지나가야 한다.

※ 비바람이 몰아치자 사람들이 오두막으로 모였다.


  점점 많은 구름들이 마추픽추로 몰려왔다. 구름을 실어오는 바람도 거세지고 있다. 잿빛 구름. 처음 내가 마추픽추에서 보았던 구름이 아니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쏟아낼 것 같은 검운 기운 섞인 구름들이 마추픽추 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구름이 거센 바람과 함께 마추픽추를 휘감고 있었다. 

   

  구름들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은 이에 보조를 맞추듯 더욱 격렬해졌고 산길로 이어지는 곳에 서 있는 나무들은 무당이 머리를 흔들며 굿을 하듯 요란하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움막 속으로 모여들었지만 비는 좀처럼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마추픽추를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더 이상 마추픽추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안내 요원들이 사람들에게 밖으로 빠져나오라고 소리쳤다. 마추픽추는 폐쇄된 것이다. 강한 비바람이 마추픽추를 점령했고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그곳을 떠나야 했다. 가벼운 구름들은 강한 비바람에 떠밀려 빠른 속도로 마추픽추를 스쳐며 지나갔다. 자칫 잘못 하면 구름에 휩쓸려 마추픽추 아래, 지상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 마추픽추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했다.


  마추픽추의 입구는 아수라장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아직도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더 이상의 입장은 불가능했다. 빗 속에서 된통 혼이난 사람의 행색이 되어 마추픽추를 빠져나오는 사람들. 셔틀버스를 타는 곳엔 사람들이 뒤엉켜 먼저 버스에 오르기 위해 악을 썼다. 자신의 발이 진흙탕에 빠져 진흙 범벅이 된 것도 모른 채, 비 내리는 마추픽추를 먼저 떠나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마추픽추 입구의 식당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 "entrada(입구)"라고 적힌 곳에서 마추픽추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다가 폐쇄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감해하는 사람들의 표정.   

  이 모든 걸 뒤로 한 채, 나는 지상으로 향하는 산길에 들어서서 한 계단씩 마을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랑비가 내 몸을 적셨다. 가랑비는 머리를 완전히 적신 다음 내 옷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비에 젖은 몸. 약간은 차갑게 느껴지는 산 속의 공기. 몸속의 열기가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올 때마다 눈 앞에는 입김이 서렸다. 마추픽추를 머리 위에 두고 갑작스럽게 지상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아쉽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가랑비에 완전히 젖어 버린 내 몸. 피부에는 차가움이 느껴졌지만, 내 몸 안쪽에서는 따뜻한 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다. 

  떨쳐 낼 수 없는 이 축축함.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한 뒤, 뜨끈하고 얼큰한 짬뽕 한 그릇이 먹고 싶었다. 물에 젖은 생쥐처럼 젖은 몰골. 샤워를 하고 난 뒤 수건을 뒤집어쓰고 난로 앞에 앉아 얼큰한 짬뽕을 먹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머물고 있는 싸구려 호텔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고, 페루의 산골짜기 마을에서 얼큰한 짬뽕을 맛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극도의 우울함이 나를 엄습해 왔다. 마추픽추에서 이렇게 우울한 기분이 들 줄이야.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공중도시는 점점 멀어져갔다. 중간쯤 내려왔을까. 우울함에 흠뻑 젖어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Hi"

  걸어서 마을로 향하는 사람이 나 말고 둘이나 더 있다니. 그들은 뉴욕에서 온 'Greg'와 'Jacob'이라고 했다. 세계 일주를 하고 있는 그들. 우리는 '여행자'라는 신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말동무가 될 수 있었고, 여행에 대해, 한국과 일본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마을을 향했다. 그들은 일본에서 영어 교사를 하며 한국에 놀러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삼겹살과 소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콥과 그레그. 비에 흠뻑 젖은 날, 지금 내가 먹을 수 없는 음식. 한국을 그립게 만드는 음식이었다. 한국을 떠난지도 벌써 10개월이 다 되어간다.


※ 우연히 내 카메라에 담긴 자콥과 그래그. 유쾌한 친구들이다.


  지상의 빗줄기는 제법 굵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우리 셋은 맥주 한잔을 하며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마추픽추 아래에서 맞는 마지막 밤이다. 어쩌면 내 기억 속에서 마추픽추는 영원히 비에 젖은 채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가랑비가 내려 옷을 적시는 날이면 나는 마추픽추를 추억한다. 축축했던, 비에 젖은 그날의 마추픽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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