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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Mar 29. 2016

티티카카 호수 이야기 : 페루 푸노

손바닥은,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들

  지구의 고동으로 '섬'이 태어났다. 어부들이 고기를 찾아 섬으로 모여들었다. 히피들이 마리화나를 좇아 섬에 다다랐다. 서퍼들이 파도를 찾아 섬으로 왔다. 카페와 여관들이 하나 둘 생겼다. 몇몇 여행객들이 섬에 들렀다.
  어떤 바보 같은 자식이 여행 잡지에 소개했다.
  관광객들이 섬을 찾기 시작했다. 어부는 손을 놓고 히피와 서퍼는 섬을 떠났다. 커다란 호텔과 상점들이 문을 열었다. 관광객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원주민들은 삶의 방식을 바꾸고 문화를 버리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섬은 오염되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과 식물의 생태계가 망가지기 시작했다.
  섬은 죽었다.

- 다카하시 아유무 <러브 앤드 프리 - 어느 히피가 읊은 '어느 섬의 일생'>

  해가 바뀌었다. 새해를 맞이한 곳은 쿠스코의 동쪽, 볼리비아에 좀 더 가까워진 '푸노'였다. 쿠스코보다 더 높은 곳. 안데스 산맥의 정점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푸노의 동쪽에는 티타카카 호수(Lake Titicaca)가 있다. 배가 떠 다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다. 호수 반대편엔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그런 곳이다. 오래된 영화 '후아유(2002, 조승우/이나영 주연)'에서 환상적인 섬이 있는 곳으로 그려졌던 낭만이 있는 그런 호수다.



0 장소 : 페루 푸노.

  

  쿠스코에서 푸노까지는 6시간이 걸렸다. 불과 여섯 시간을 이동했을 뿐인데 푸노의 공기는 쿠스코보다 차가웠다. 낮의 햇살은 따사로웠다고 할 수 있었지만 반팔 반바지를 입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고, 밤에는 바람막이 안에 옷을 몇 겹씩 껴 입고 털모자를 써야 할 정도였다. 늦가을 혹은 초겨울에 가까운 날씨 정도 될까? 이제 막 1월이 시작되었으니 본격적인 여름이라고 할 만한데도 불구하고 푸노는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티타카카 호수에 갈 생각이었다. 바다만큼 넓은 호수. 그곳엔 무엇이 있길래 관광객들이 호수 저 안쪽으로 가는 것일까? 푸노의 뒷산에 올라 한참 동안 호수를 바라봤다. 호수 저 편. 그곳에도 분명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무너진 흙담 사이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내일은 호수에 갈 것이다.  

  푸노의 여행사들은 다양한 종류의 티티카카 호수 투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일일 투어를 신청해 두었다. 아침 일찍 푸노를 출발해서 우로스(Uros) 섬과 타킬레(Taquile) 섬을 둘러본 뒤 저녁 무렵에 푸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 푸노의 시장. 시장엔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난다. 시장을 들른 후 나는 도시 뒤쪽 언덕에 올랐다. 무너진 흙담 사이에서 축구를 하며 웃고 있는 아이들. 마을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푸노와 티티카카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언덕, 도시의 정점 콘도르(새) 동상이 있는 곳의 높이는 해발고도 4017미터.


  아침 일찍 호스텔 앞으로 픽업 나온 차를 타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는 많은 배들이 묶여 있고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바다와도 같은 호수. 바다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빼곤 바다와 다를 게 없다. 너울이 일고 있는 감청색의 호수. 그 깊이를 짐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배는 물결을 가르며 첫 번째 목적지인 '우로스 섬'으로 향했다. 


  우로스 섬은 티티카카 호수 위에 떠 있는 인공섬이다. 지표면에 붙어 위로 솟은 섬이 아니라 이곳 티티카카 호수의 원주민들이 만든 인공섬이다. 어쩌면 '갈대 더미'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우로스. 티티카카 호수의 원주민들 중 일부는 '우로스 섬'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로스 섬은 예나 지금이나 '외부인'들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이 갈대로 만든 우로스 섬에 올라보기 위해서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기 위해 '우로스'를 찾고있고 우로스 섬은 푸노의 중요한 관광 자원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로스 섬'이 생겨나게 된 이유는 바로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마추픽추에서 그랬듯 스페인 정복자들은 푸노로 밀려들었고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원주민들은 호수 위에 삶의 터전을 잡았다. 원주민들은 인공섬(우로스)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스페인 정복자들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우로스의 여인들은 관광객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관광객들을 위한 환영의 노래였을까. 노래가 끝난 뒤 그녀들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그 슬픔의 표정이 호수 위의 삶이 고단해서인지 앞에 있는 관광객들에게 무언가를 바라며 지은 표정인지 분간할 길이 없었다. 


우로스 섬의 원주민들. 우로스 섬은 토토라(갈대의 일종)를 엮어 만든 인공 섬이다.


  나는 섬 한쪽에 앉아 호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타고 온 배에는 10명이 올랐었다. 4쌍의 커플. 그리고 혼자서 호수를 찾은 사람 두 명. 그 둘 중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마추픽추에서 당신을 봤어요."

 

  혼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거는 그녀. 나를 마추픽추에서 봤다니. 그러고 보니 그녀를 어디선가 본 듯도 하다.

  "에? 낯익은 것 같기도 한데.. 전 잘 모르겠네요."


  그녀는 카메라를 내게 보여주었다. 마추픽추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녀가 찍은 사진 속에 사람들이 여럿 찍혀있고 거기에 내가 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나도 설핏 기억이 난다. 화장기 없는 얼굴. 단발머리.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수수한 옷차람이었기에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마추픽추에서 봤던 유일한 동양인이었기에 기억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마유코'라고 소개했다. 일본인 특유의 볼터치가 없어서였을까. 나는 그녀가 일본인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우리 일행은 갈대로 만든 배에 올랐다.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 하나가 뱃머리로 나와 섰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를 젓는 남자는 아이들의 노래에 장단을 맞추며 흥을 돋우었다. 노래가 끝나자 아이들은 모자를 벗어 뒤집었다. 뒤집힌 모자 안으로 누군가는 동전을 누군가는 지폐를 하나 씩 넣어 주었다. 마유코는 지폐를 한 장 넣었다.


아이들도 관광객들 앞에 나서 노래를 불렀다.

※ 성난 물결이 일고 있는 타킬레섬의 선착장. 티티카카 호수는 '바다'라는 착각이 들 만한 곳이다.


  보트는 타킬레 섬을 향해 나아갔다. 사방이 탁 트인 호수. 산자락으로부터 흘러내린 바람은 호수 표면에 큰 물결을 만들었다. 바람과 물결을 가르며 달리는 보트는 힘에 겨운 듯 심하게 휘청댔고 보트에 타고 있던 누군가는 헛구역질을 해댔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타킬레 섬. 호수 안에 있는 섬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섬이었다. 선장은 우리를 언덕 중간에 있는 외딴집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점심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식사가 한창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어디선가 악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까 전만 해도 음식이 나왔던 곳에서 두 명의 여인네와 한 명의 남자가 춤을 추며 나왔고 또 다른 한 남자는 악기를 연주하며 등장했다. 타킬레 섬의 전통 춤이라 했다. 우리는 식사를 마무리하며 그네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식사를 끝내고 공연을 지켜보던 관광객 몇몇이 무대로 불려 나갔고 원주민의 틈에 끼어 강강술래를 하듯 함께 마당을 빙그르르 돌았다. 공연이 끝난 뒤 어린 여자가 모자를 뒤집고 관광객들 앞에 섰다.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노골적인 '기부 요구'를 하며 이에 응하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선 모습. 이 사람들이 원래 이랬을까. 언젠가는 순수했던 사람들일 것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삶의 방식이 바뀌었을 것이다.


선착장에서 약간의 언덕을 올라 점심 식사를 허라 갔다. 평화로운 섬의 풍경이다.

※ 식사가 끝날 무렵 공연이 시작되었다. 원주민 가족들은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췄고, 일부 관광객들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 타킬레 섬의 광장으로 향하는 길. 광장 위에서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는다.

※ 광장을 빠져나와 둘레길을 걸었다. 둘레길이 끝나는 지점에 배가 있다.


  타킬레 마을의 광장에 올라 호수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이곳이 바다야"라고 말하면 믿을 것만 같은 호수. 수평선 그 아래에서는 구름이 피어올랐다. 아이들 무리가 달려와 관광객들을 둘러쌌다. 아이들의 손엔 팔찌와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그걸 사 달라고 아우성쳤다.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덩치가 작은 아이는 관광객들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아이들의 표정에서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하나라도 더 팔고 싶다는 소망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다. 관광객에게 물건을 건넨 아이는 기뻐했다. 하지만 과연 그 기쁨과 환호가 온전히 그 아이의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과연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작은 섬. 관광지의 아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탐욕 때문에 즐거움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마유코와 나는 광장을 떠나 섬의 외딴길을 걸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유난히 차가웠다.

  "구걸하는 아이들. 부모의 욕심 때문이 아닐까요?"


  나의 물음에 마유코는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라고, 어린아이들이 관광객들에게 매달릴 이유는 없다고 했다.

  외딴길이 끝나는 곳에 배가 있었다. 배는 푸노로 되돌아 왔다. 선착장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았을 때 티티카카 호수와 푸노가 서로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공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발아래, 바다보다 넓은 호수를 두고. 손바닥은,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들. 어느 외딴섬 코흘리개 아이들의 웃음은, 
  어른들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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