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와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거리. 그곳에 햇살이 비치면
희망차게 여행하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좋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발트해 연안의 3개 나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이 3개 나라는 발트 3국이라 불렸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스웨덴과 덴마크 그리고 발트 3국보다 더 북쪽에 있는 핀란드도 발트해를 공유하고 있었지만 발트 3국이란 말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어딜 가든 함께 간다는 세 자매처럼, 3종 선물세트에 들어가는 물건처럼 이들은 서로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묶였다.
발트 3국. 이들 세 나라가 함께 이야기되는 것은 유럽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난의 시간을 함께 겪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격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소련 연방에 속해 있던 이들 세 나라는 1991년 독립을 맞이했고, 그 이후 정치적으로 유럽 사회의 일원이 되는 행보를 함께 이어가고 있었다. 세 나라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점은 정치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하도록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행자들이 이들 세 나라를 함께 둘러보는 것을 수월하게 만들기도 했다. 마치 발틱 3국이라는 이름의 한 나라를 둘러보는 느낌이 돌도록 말이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은 비슷한듯 하면서도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장소 : 발트 3국(리투아니아 빌뉴스/라트비아 리가/에스토니아 탈린)
비가 내리고 있다고 했다. 바르샤바의 기차역. 허공에 떠 있는 전광판에서는 유럽 지역의 일기예보가 나오고 있었다. 회색 구름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이미지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를 가리고 있었다. 동유럽 전역에 비가 내렸고 발트 3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르샤바에서 기차를 타고 8시간 달리면 도착한다는 빌뉴스에는 오늘도 비, 내일도 비가 내린다고 했다.
비가 내린다는 것은 여행자들에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특별히 비가 내리는 광경을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는 영락없는 불청객이다. 날씨 좋다는 봄날, 비가 내린다는 것은 슬프기까지 하다. 슬프다고 해서 마냥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바로 여행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비가 항상 나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비와 낭만, 비는 많은 경우에 낭만적인 소재로 그려지기도 했다. 낭만과 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던 것이다. 많은 영화 -비록 오래전 영화이지만 '접속(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클래식(2003)' 등- 에서 비는 우리를 설레게 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빗속을 걷다 보면 어쩌면 운명적 만남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끔 했다. 잠시만이라도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는 사실을 잊자.
빌뉴스의 거리에 떨어지는 빗방울. 오랫동안 그칠 줄 모르고 떨어졌다. 속 시원히 마구 쏟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숙소에 죽치고 앉아 있기는 애매할 정도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 가랑비는 아니었지만 오락가락 떨어지는 빗방울을 잘만 피하면 옷이 많이 젖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거리로 나섰다.
빌뉴스 거리의 분위기는 복합적인 느낌이었다. 체코나 폴란드, 헝가리와 같은 여느 동유럽 국가들에서 느낄 수 있는 동유럽만의 고즈넉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좀 더 소박하고 아담하다는 느낌이 든다고나 해야 할까. 흐린 날씨.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이었을까. 작고 아담한 거리. 노점상들이 물건을 팔고 있는 거리에는 잔뜩 찌푸린 하늘 때문인지 생기가 없어 보였지만 상점들에서 발틱만의 독특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6월 중순인데도 불구하고 상점들은 털장갑과 털모자와 같은 한겨울에나 쓸 법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의 날씨는 이제 막 겨울이 끝나고 봄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털모자와 털장갑을 팔고 있는 한쪽엔 꽃이 심어진 화분을 팔고 있었고 그곳엔 사람들이 붐볐다. 이제 이곳도 봄인 것이었다. 6월 중순으로 막 접어든 이곳 북부 유럽에 가까운 발틱은 이제 막 봄이 찾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봄을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느낄 수 있는 봄의 기운. 5월, 터키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봄의 기운이 다시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봄은 언제나 설렌다.
※ 빌뉴스 중심가인 TownHall 주변에 관광객들이 모여있다. 무리지어 어디론가 향하는 관광객들을 볼 수 있다.
※ 빌뉴스 시타델(Cathedral).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왼쪽 사진의 건물아래 작은 점이 사람이다.
※ 거리 곳곳에는 꽃을 파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아직 털모자, 털장갑 등을 팔고 있다. 6월 중순이 다 되었지만 쌀쌀한 날씨다.
빌뉴스의 눅눅한 거리를 떠난 버스는 리가를 향해 5시간을 달렸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국경을 지날 때 보았던 국경 검문소에는 잡초만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유럽의 통함. 그 이후 국경 검문소는 유명무실해졌고 지리적 영토의 경계를 지날 때도 그 어떤 검사를 하지 않았다. 국경을 지난 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단지 '웰컴'이라고 적힌 표지판뿐. 그마저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내가 국경을 건넜는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라트비아의 리가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은 빌뉴스의 그것보다 더 굵어져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숙소를 향해 뛰었고 체크인을 하고 나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비 맞은 뒤, 온몸을 감싸는 온수의 따스함. 도미토리의 2층 침대에 올라 창 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엔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거리는 환했다. 밤 9시가 되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밝았고 11시가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라트비아 사람들의 호탕한 성격을 반영한 듯 리가의 거리는 큼직했다. 비 내리는 리가의 거리. 거리를 쏘다니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어디서든지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펍이든 노천카페든. 아침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며 기분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비 내리는 거리의 분위기는 무거웠지만 펍과 노천카페는 항상 시끌벅적했다. 밤늦은 시간. 가로등의 불빛이 무색할 정도로 밝은 거리. 사람들은 얼굴을 붉힌 채 비틀거렸다.
빌뉴스의 사람들은 아늑한 밤을 준비하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지만 리가의 사람들은 펍으로 노천카페로 몰려들어 시끌벅적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그 위에 놓인 나무 테이블의 눅눅함. 아늑한 공기로 가득 찬 펍에서 사람들은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관대하다. 더욱이 술을 마시면서 기분이 한껏 들뜬상태라면 이방인에게 호의를 베풀어준다. 나 역시 그들에게 이방인이었다.
※ 리마 역사지구에 위치한 리가의 시타델(Rigas Doms)은 빌뉴스보다는 아담하지만 건물의 모양(양식)에 차이가 보인다. 빌뉴스의 시타델이 르네상스 양식이라면 리가의 시타델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 리가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인 3형제 건물(the three brothers). 구시가 역시지구에 있으며 15세기, 15세기에 지어진 독특한 양식의 건물이다(왼쪽). 발트해로 흐르는 다우가바 강과 반수 다리(오른쪽).
※ 구시가와 버스터미널 뒤쪽의 마켓. 비가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다.
※ 리가의 빵. 빵을 좋아하는 필자는 유럽 전역에서 빵을 먹어 봤지만 라트비아의 빵이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버스는 발트해 연안에 접한 북쪽 끝의 도시 탈린의 향해 달렸다. 리가에서 탈린까지 4시간 30분. 버스가 북쪽을 향해 달릴 때 바라본 저 멀리 있는 하늘. 그곳은 아직 파란색이었다.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렸고 구름을 따라잡았다. 탈린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햇살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새벽이 되자 비는 천둥번개까지 동원해가며 거칠게 내렸다. 나는 발틱의 마지막 도시에서마저 비를 맞아야 했다.
리가에서부터 북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곳. 발트해에 접한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아직 차가웠다.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는 입김이 나왔다. 빌뉴스, 리가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탈린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방, 그리고 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 서울 중심의 수도권 지방의 음식이 다르고 생활 습관이 다르고 지역의 분위기가 다르듯 이곳 또한 각각의 분위기가 달랐다. 빌뉴스가 동유럽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닮아갔다면 리가는 그들만의 개성이 강했고 탈린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의 영향이었는지 동화속의 이미지가 묻어났다.
※ 탈린의 올드타운. 비가 내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다.
※ 올드타운의 입구(왼쪽)과 꽃 가게.
꼭두각시 병정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도시의 풍경. 탈린의 비 오는 거리를 걸으며 파란 하늘의 탈린을 상상했다. 탈린에서만큼은 맑은 하늘 아래 햇살이 비치는 거리를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잿빛 구름 속에 가려지고 빗물에 젖은 탈린의 거리는 진흙 속에 가려진 진주라고나 해야 할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햇살이 비치는 탈린을 상상했다.
탈린에 온 지 3일째 되는 날. 햇살이 도시를 비추었다. 그리고 아름답게 빛나는 탈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담함 속에서 빛나는 눈부신 아름다움이었다. 그것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발트해 연안의 빛나는 보석 같았다. 문득, 비 내리던 발틱의 거리들이 모두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가 와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발틱의 거리. 그렇지만 그곳에 햇살이 비치면 이처럼 아름답게 빛날 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