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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Apr 15. 2016

아우슈비츠, 누군가에겐 슬픈 과거 그 넘어 : 폴란드

어떤 날은 분명 꽃이 피는 봄날이었을 것이다.

여행은 다른 시대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

- 르네 데카르트.

  남풍이 불었다. 나는 바람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검은 구름은 나를 따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까지 왔지만 다행히 폴란드 남부의 크라쿠프(Krakow)에는 아직 오지 않았다. 파란 하늘엔 먼지하나 끼어 있지 않았다. 폴란드 제2의 도시라는 말에 대도시를 상상했었지만 크라쿠프에는 중세시대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건물 사이로 트램이 지나고 있다. 혼잡함과는 거리가 먼 도시였고 그 누구도 급하거나 바쁘지 않았다. 폴스카(Polska). 이곳은 인도 여행에서 만났던 마그다의 조국이기도 했다. 마그다는 자신의 고향이 크라쿠프와는 멀리 떨어진, 한국으로 치면 광주광역시와 강릉의 위치 관계쯤 되는 발트해 연안의 그단인스크라고 말하면서도 내게 꼭 크라쿠프에 가 보라고 이야기했다. 그곳에는 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다. 



0 장소 : 폴란드 크라쿠프-오시비엥침


  오시비엥침(Oswiecim). 50km. 크라쿠프에서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리면 도착하는 곳이다. 크라쿠프 서쪽에 위치한 이 작은 도시는 오시비엥침이라는 이름보다는 독일어 이름인 '아우슈비츠(Auschwitz)'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있다. 그렇다. 이곳은 수 많은 영화의 주제이기도했고 많은 이들이 자신이 겪은 일들을 책으로 출판했던,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장소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 바로 그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가 있는 곳이다. 그곳에 가 보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수 많은 유태인들이 기차에 실려 이곳으로 끌려왔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독가스를 마시며 쓰러져갔고 연기가 되어 하늘로 사라져갔는지를 말이다. 억압과 핍박 받으며 한 시기를 견뎌내야했던 한 민족의 슬픈 역사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또한 그와 비슷한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 제1수용소. 입구 안내소에는 한국어로 된 책자도 판매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총살을 했던 장소. 

※ 사진의 HALT(독일어), STOJ(폴란드어)의 뜻흔 영어의 'Stand'의 의미이다. 담장 아래에서 '거기 멈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식 명칭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박물관. 흔히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라 부르는 이곳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나의 수용소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지금은 관광 안내소와 매표소를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있는 제1수용소를 비롯해서 넓은 대지 위에 철로가 깔린 제2수용소와 추가로 만들었다는 제3수용소까지. 이곳에서 죽은 유태인의 수는 약 100만 명에 이르며 유태인 외에도 주변의 폴란드인과 나치에게 붙잡힌 집시, 정치법과 소련군 전쟁 포로, 동성연애자 등 많은 이들이 아우슈비츠로 끌려왔고 이곳에서 최소한 1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죽어나갔으니 그 규모는 어땠을 것이며 시체들을 태울 때 뿜어져나오는 연기는 어떠했겠는가. 이곳에서 살아남은 많은 이들이 증언했듯 이곳은 분명 '생지옥'이었고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가 지금 이렇게 남아 무엇을 전하고 있는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70여년이 세월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하나의 역사가 되었고 이 현장은 관광지화 되어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여느 관광지, 예컨대 경주나 공주, 부여 등의 여러 문화유적나 서울 서대문구의 서대문 형무소와 같은 곳을 많은 이들이 습관적으로 찾는 것처럼 아우슈비츠 또한 인류가 남긴 하나의 슬픈 역사의 상징이 되어 사람들의 발길을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곳곳에 남아 있는 고통의 흔적들. 전시실 복도에 걸린 죽은 이들의 사진. 유리벽 너머에 놓여있는 죽은 이들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었다는 양탄자와 그들의 피부를 녹여 만든 비누. 누군가는 이를 보며 "고통을 받다가 죽음을 맞이한 뒤에도 다른 사람의 구경거리 밖에 되지 않으니 얼마나 불쌍한가"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비참한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지만 후세에게 과거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고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니 얼마나 의미있는 죽음인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불행한 죽음과 의미있는 죽음 사이를 오가는 공간이다.


※ 제1수용소의 내부 전시실. 벽에 걸린 유태인의 사진

※ 유태인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양탄자와 남아있는 머리카락의 일부. 사람들을 독살 시키는데 사용했던 독가스 캔(오른쪽)

※ 고등학생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왼쪽).

※ 사람들을 불태워 연기로 만들었던 장소.


  소풍을 나온듯한 폴란드의 고등학생 아이들은 수용소를 둘러보는 일에 흥미가 없는 듯 삼삼오오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샤워장을 가장한 독가스실과 사람들을 검은 연기로 변하게 했을 화장터를 차례로 둘러봤다. 화장을 하기 위해 사용했다던 건물의 으스스함.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제1수용소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제2수용소. 셔틀버스를 타고 도착한 제2수용소에는 봄 기운이 만연해있었다. 이곳 제2수용소에는 철로가 깔려있었고 그 철로를 따라 유태인을 한가득 실은 기차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유태인 중 일부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독가스실로 향했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들은 독가스를 마시는 그 순간까지 그곳이 독가스실인 줄 몰랐을 것이고 그런 일이 반복되던 수 많은 날 중 어떤 날은 분명 꽃이 피는 봄날이었을 것이다.


※ 제2수용소의 모습. 제2수용소의 규모는 엄청났다.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를 둘러보는 일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과거. 찬란했던 문화가 남긴 흔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는 '슬픈 과거'를 바라보아야 했다. 어쩌면, 대한민국이 가진 역사의 한 장면도 이와 유사했지만 그 과거를 대하는 지금의 태도가 이곳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데서 오는 괴리감과 안타까움이 더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이곳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면서 이를 통해 보다 긍정적이고 나은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우슈비츠의 엄숙함을 뒤로한 채 크라쿠프로 돌아왔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만난 두 명의 한국 사람과 함께 크라쿠프 메인 광장에 앉았다. 의료관련 학회가 있어 크라쿠프에 오게 됐다는 사람들이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분좋은 오후. 크라쿠프 메인 광장에서 느낄 수 있던 생기발랄함은 즐거운 저녁을 보내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노천 카페에 앉아 폴란드의 유명한 맥주 지비에츠(Zywiec)를 마시며 폴란드식 만두 피에로기(Pierogi) 그리고 밥만 비벼준다면 김치 볶음밥이 될 것 같았던 비고스(Bigos)로 배를 채웠다. 부족한 것이 없는 풍족한 저녁이었다. 

  숙연함이 느껴지던 아우슈비츠와는 달리 크라쿠프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크라쿠프의 밤공기는 상쾌했다.

※ 크라쿠프 시가지의 모습. 조용하고 투명한 거리다. 메인 광장에는 항상 여유로움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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