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려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갑자기 '공사 중'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이전에도 종종 고장이 났는데 그럴 때마다 움직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 아니면 계단으로 오르곤 했다. 물론 그 거리는 만만치 않아서 힘들었는데 방법이 없으니 아니 없다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저히 걸어갈 엄두가 안 났다. 배도 너무 고프고 감기에 걸린 탓에 힘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반대 방향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이었다. 반대 방향으로 올라간 뒤 횡단보도를 건너면 조금은 돌아가겠지만 적어도 계단을 오르는 만큼 힘들지 않을 터라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반대편으로 올라간 세상은 전혀 달랐다. 길 건너면 보이는 세상인데도 지하철에서 내린 뒤 무의식적으로 집으로만 가는 까닭에 길 건너편에는 뭐가 있는지 어떤 곳인지 관심도 없었다.
막상 올라가 보니 에스컬레이터로 오르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 집에 가야지 했던 생각이 사라졌다. 새롭게 단장한 가게들이 즐비한 곳으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이어졌다.
맛있어 보이는 베트남 음식점으로 들어가서 반미 샌드위치와 따뜻한 캐모마일을 먹으니 하루 동안의 고단함과 피로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이 맛있는 샌드위치와 따뜻한 차, 깔끔한 인테리어 덕분에 새로 생긴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꽤 되었는데 그쪽으로 갈 일이 없어서 몰랐던 것이다. 허기를 채우고 나오니 다른 가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저기다.
에스컬레이터의 고장이 없었다면 오지 않았을 신기한 경험을 하니 지척에 새로운 곳을 두고도 알지 못했다는 자책 아닌 자책도 했지만 우연이 만들어낸 산물에 그저 만족하고 또 다른 우연, 그에 따른 새로움을 기다려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때 더 기쁜 법이니까.
매일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순간에 에스컬레이커 마저 고장 나는 바람에 '더 힘들어졌네'가 아니라 이참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네'라고 생각하니 삶이 덜 고단해졌다. 아니 재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