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다. 사기업으로 이직한 이후 좀 더 큰 범위에서 홍보 관련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데 결코 만만치가 않다.
내부적으로 협조는 되지 않고 웬 사공들만 이렇게 많은지 거기에 훈수만 두려는 층층시야 시어머니들만 한 보따리다. 일을 하는 것보다 이런 상황을 조율하는 게 더 쉽지 않다. 그러면서 말만 많다. 어쩌니 저쩌니.
요즘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tvn의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이다. 의사 파업으로 그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면서 관련 드라마도 보지 않으려 했지만 우연히 보다 보니 꼭 의사들의 얘기보다는 직장생활 혹은 인간 군상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어서 계속 시청하게 됐다.
그중 빌런으로 묘사되는 인물이 '명은원'이란 캐릭터다. 힘든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좋고 빛나는 것만 독차지하려는(이전 시리즈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 드라마는 보지 않아서 어떻게 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뭐 비슷하게 나왔겠지) 그런 특징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인물을 보면서 혈압이 오르고 욕을 하지만 문제는 실제로 현실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명은원뿐만 아니라 명은원 2, 3이 주르르 포진해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업무 관련해서도 협조를 요청하면 무조건 안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도움을 당연하게 요청하는 등 어이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전사적으로 추진하는 업무들에 있어서는 해당 과에서 협조를 해줘야 하는데 일은 하기는 싫고 또 콩고물은 나눠먹고 싶어 하는 인간들만 한 트럭이다.
그런데 어제 회차를 보면서 엄재일이라는 전공의 1년 차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아마 극 중 명은원이라는 인물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아닐까 한다. 항상 밝게 웃으면서 일을 대하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아직 1년 차이기 때문에 실수도 반복하는 인물이다. 어제 에피소드에서는 이런 엄재일을 두고 그 아랫사람인 인턴이 이용해 먹는 장면이 나왔다. 혼내지도 않고 알아서 다 한다며 만만하다고 말하는데 그걸 엄재일이 직접적으로 듣는다.
진짜 흥미로운 것은 이후부터다. 엄재일은 그런 소리를 듣고도 다시 그 인턴을 마주했을 때 티도 내지 않고 묵묵히 여전히 같은 태도로 임한다. 이전처럼 인턴에게 위로하고 나머지 일들을 대신해 주는 등. 물론 뒤에 선배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긴 하지만 그래도 엄재일은 엄재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수많은 명은원 속에서 살고 있지만 곳곳에서 엄재일을 본다. 이번에 추진하는 업무 관련해 이전의 경험이 거의 없는터라 이리저리 묻고 다니는데 수많은 명은원 속에서 곳곳에 보석 같은 엄재일이 꼭 한 명씩은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수많은 명은원 속에 치이다 보니 나도 똑같이 해주리라 다짐하면서 흑화하려고 했지만 엄재일을 보면서 엄재일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도움들은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실상 명은원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지만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어제 회차에서는 아직까지 승승장구했지만) 지금 내가 추진하는 업무 관련해서도 빌런이 포진해 있지만 내가 굳이 신경을 쓰지 않고 협조가 안되면 플랜 B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항상 그런 빌런들의 최후를 실제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엄재일을 만만하게 봤던 인턴에게 똑같이 할 필요가 없는 게 그런 빌런들은 알아서, 정말 알아서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디서나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불평등한 것 같기만 또 공평하다. 시차는 있지만 결코 오차는 없는 것이다. 자기가 행동하는 만큼 그다음 무대가 펼쳐지는데 명은원 같은 이들은 지금은 운이 좋게 때문에 결코 모를 뿐 어느 때가 오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누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갈림길에 서게 된다. 명은원이 될 것이냐 엄재일이 될 것이냐. 그 선택은 자신이 하면 된다. 다행히 나는 흑화되기 전에 엄재일을 보면서 엄재일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국 세상은 이런 사람들로 제대로 돌아간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