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올 한 해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너무 많은 일이 많았으므로 어떨 때는 너무 길다 싶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내 바람과 상관없이 규칙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한 해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결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2022년부터 시작한 연 책 100권 프로젝트는 이제 5권 만을 남겨두었다. 치열하게 일을 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책 속으로 도망쳤다. 책을 통해 새로운 기운을 보충하고 비장하게 일상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왜 이토록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반문하게 되었다. 읽는 책 중 거의 7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추리소설은, 정확히는 추리 및 스릴러 소설은 어떤 매력이 있길래 손에 놓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름하야 내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다.
먼저, 사물을 유심히 보고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추리소설은 그야말로 읽는 내내 긴장을 멈출 수가 없는데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단서들이라고 해도 그것이 나중에 거대한 진실의 한 축이 되는 경우가 많기에 정말 첫 장부터 꼼꼼히 읽어야 한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라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책이 펼쳐지는 첫 문장부터 어쩌면 단서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일상생활을 할 때도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도록 꼼꼼히 관찰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누가 어떤 말을 하면 잘 기억하려고 하고 무슨 의미를 가질까 반추한다. 즉 현실에서 뭔가 일이 발생하면 이것이 나중에 필요한 요소로 밝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하나하나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이다. 대신 단점은 그래서인지 인생이 피곤하다.
둘째,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책을 읽어 가는 내내 머릿속으로는 누가 범인일지를 끊임없이 추적하는데 맞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허를 뚫려서 순간 멍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등장인물 중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경우 안타까운 결말로 되지 않길 바라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럴 때는 무력함보다 현실세계에서도 모든 일이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르면서도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는 내공을 쌓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셋째, 인내력을 기를 수 있다. 추리소설이 처음부터 재미있을 수 없다. 물론, 첫 문장부터 사로잡히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처음에는 하얀 종이 위에 글씨가 쓰이면서 세계관이 시작되는데 또 하나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들이 있다. 배경이 묘사되고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몰랐던 세상들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는데 이는 자칫 지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 따라서 보다 장황하게 펼쳐놓는 스타일인 경우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 지루함을 느끼기도 한다(보통 추리소설에서는 짧은 단문을 많이 쓰지만 작가에 따라서는 만연체를 쓰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때로는 그것도 매력적일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에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랬던 공간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더욱 극대화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지루함을 견디고 묵묵히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하나의 점들이 줄들로 이어지면서 거대한 세계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묵묵히 하지만 지루함을 느낄 때가 있다. 뭔가 전환점이 있으면 좋겠고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싶은데 어쩐지 반복적인 일상만 마주하는 느낌이 드는 것. 그러나 새로운 변곡점은 필시 이 지루한 구간을 견디고 견디었을 때에만 비로소 주어진다는 것을 추리소설을 통해 깨닫게 됐다. 그래서 현실에서도 좀 더 견디고 인내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넷째, 위에 인내력과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래서 도파민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그렇게 견디고 견디었을 때 모든 퍼즐이 하나둘씩 맞혀지면서 마지막 퍼즐이 맞혀질 때 도파민의 파티가 시작된다. 요즘 숏츠나 자극적인 예능 등을 도파민이라고 하고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것, 더 말초적인 것들을 찾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추리소설, 스릴러 소설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두고 있는 그 지점이 바로 도파민이 터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사소하게 보이는 단서나 등장인물들이 얼핏 흘리고 간 말들이 교묘하게 이어지면서 하나의 거대한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앞 전 지루함을 견디었기에 그 짜릿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서 도파민을 충족하고 싶은 사람들은 반드시 추리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 영상은 그 자체로 소비되고 더 많은 자극을 요구하지만 책은 인과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을 해결해 가면 쉬이 잊지 못한 도파민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수많은 선택의 대리 경험을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은 대게 어떤 상황에 놓이고 끊임없는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이 길로 가면 되나. 이렇게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주인공과 함께 따라가다 보면 선택에 따라 전혀 상황이 다른 결과가 펼쳐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 현실에서 적용해 보면 늘 수많은 선택 속에서 뭐가 최적인지 고민하는데 이것은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알고 나서야 좋은 판단이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책을 통해서 수많은 대리 선택을 경험하면 현실에는 좀 더 나은 선택, 그동안 축적되어 온 데이터를 가동해서 적어도 내가 불리해지지 않을 선택을 하게 된다. 또한 그 선택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게 보면 그들은 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들의 편리성을 위해 내 선택을 부정하곤 한다(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아는 세상을 기준으로 반대한다). 그럴 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왜냐면 나는 수많은 대리 선택을 통해서 선택하는 법을 연습했고 첫 번째 특징이었던 사물을 유심히 보고 사람들의 말을 잘 경청하는 습관 덕분에 나에게 더 잘 맞는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잘되기 바라는 사람은 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여섯째, 일상의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다. 거대한 사건, 혹은 수많은 사건들이 얽혀 있는 세상을 경험하고 나면 지금의 일상이 얼마나 안온한지 깨달을 수 있다. 때로는 그것이 지루하고 노잼일 수 있지만 어떤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만큼 축복받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가 그랬다. 지금 가지고 있는 최대의 고민이 '저녁 뭐 먹지?'라면 지금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생존의 문제를 다른 이는 경제적인 고민 혹은 인간관계로 인한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들을 책을 통해 경험하면서 이 평안함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된다.
그 외에도 책 자체의 재미, 책 속에 나오는 사회적인 현상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경우보다 폭넓은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등의 다른 장점들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추리소설의 수많은 작가들과 책들과 함께 하는 세상이 귀하고 감사한 것은 나를 끊임없이 돌아보게 만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해 준다는 점이다. 3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을 리 없다. 분명히 전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기를 바라본다.
마지막 남은 기간 동안 100권을 다 채울지는 알 수 없지만 늘 그렇듯이 뚜벅뚜벅 걸어 나가려 한다. 숫자로 채우는 목표 달성보다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알게 해주는 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