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무 Apr 06. 2022

다른 세계를 알아 간다는 것은?

책 <내 이름은 임마꿀레>

책의 좋은 점은 단순히 그 책에 들어있는 내용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잠깐 언급된 내용을 알기 위해 다른 책을 접하는 순간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재 읽고 있는 책과 연결되는 지점도 있고 아예 전혀 다른 분야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다가 르완다 내전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저자가 인간의 잔혹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례 중 하나로 설명한 것이다. 세계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고 관심도 많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 혹은 서양 위주의 세계사만 배우고 익혀왔던 터라 르완다라는 국가와 거기서 발생한 내전은 생소했다.  


관련 내용을 찾아보니 르완다 내전은 토착 부족인 후투족과 소수민족인 투치족 간의 종족 분쟁으로 다수파 피지배계층이었던 후투족과 소수파 지배층을 형성해 온 투치족의 갈등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이 같은 내분은 서구 제국주의부터 야기되었는데 벨기에가 르완다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보다 서구적인 외모에 가까운 투치족을 지배계급으로 그렇지 않은 후투족을 피지배계급으로 나누고 인위적으로 차별을 하면서 두 종족 간의 갈등이 심화됐다. 이후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벨기에가 이번에는 후투족을 지원하면서 갈등 양상은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다. 양 종족 간 분쟁은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면서 화합으로 가는 듯했으나 결정적으로 94년 후투족 출신 대통령의 비행기가 격추돼 대통령이 사망하자 후투족은 투치족의 소행으로 보고 투치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자료를 따라가다 94년 내전의 투치족 생존자의 기록이 담긴 책 '내 이름은 임마꿀레'까지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도서관에도 서고 안쪽 깊숙이 있어 사서가 직접 가져다 줄 정도로 희귀했다.  


책은 투치족으로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임마꿀레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자신이 투치족인지 후투족인지 모를 정도 정도로 차별 없이 사랑으로만 커왔던 임마꿀레는 어느 순간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느낀다. 그동안 투치족에 대한 차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놓고 폭력이나 살해의 위협은 느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후투족 출신 대통령의 사망 소식과 함께 라디오에서는 투치족은 죽여할 대상이라고 선동하는 소리가 나오면서 후투족의 투치족에 대한 대규모의 학살이 시작되고 그렇게 지옥의 문이 열렸다. 다정한 이웃이었고 친구였던 이들이 한순간에 자신을 포함해 자신의 가족을 죽이러 다니는 것을 목도하게 되고 투치족은 광기와도 같은 후투족에 의해 스러져간다. 임마꿀레는 다행히 어느 목사의 도움으로 방 한편에 있는 화장실에서 7~8명의 여자들과 함께 석 달 정도를 숨어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 마저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 투치족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온 나라를 샅샅이 뒤지던 후투족은 임마꿀레가 숨어있는 화장실 바로 앞까지 도달한다.


임마꿀레는 이 대규모 학살에서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오빠마저 잃게 되었다. 매일 아침 웃으며 인사하던 이들의 짓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임마꿀레가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가 고스란히 전해져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인간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상황은 후투족에 맞서 투치족 반군이 맹렬하게 싸우고 수도를 다시 장악하면서 해결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렇게 투치족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상황이 겨우 마무리될 무렵에 후투족을 암암리에 지원해왔던 프랑스가 뒤늦게 투치족에 대해 지원을 하는데 국제사회 역시 이 대규모의 학살이 자행되는 동안 내부 분쟁이라 여기며 관여하지 않아 더 큰 피해가 발생하도록 놔두었다.


인상적인 장면은 다시 세상에 나온 임파꿀레의 태도였다. 목숨만 겨우 구하고 가족들을 비롯해 친척들이 거의 살아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는 결코 분노하거나 보복을 다짐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제는 지난한 전쟁을 끝내고 화합의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랜 종족 갈등으로 인해 가족들이 모두 죽은 상황에서 임마꿀레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불가능할 것 같았다.


90년대 중반이면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적 호황기를 맞고 있던 시기로 알고 있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살육전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발칸반도에서 보스니아 내전이 있다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이 역시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살육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학살인 홀로코스트 외에 그 후로도 아프리카, 유럽 할 것 없이 또다시 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학살이 자행되었다니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우리나라 외에 더 많은 나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같은 일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너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앞으로 좀 더 시각을 좀 더 넓혀가며 세상을 바라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최근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이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볼 때 좀 더 국제사회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좀 많아졌다. 인간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없이 잔혹해질 수도 있지만 임마꿀레처럼 증오의 싹이 더 이상 크지 않게 잘라버리는 것 역시 사람이라서 가능한 것일까 하는 마음때문이다. 그동안 몰랐던 다양한 세계를 돌아보고 알아가면서 생각과 마음을 좀 더 넓혀 나가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모두 다정해질 필요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