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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케이 Apr 11. 2022

복수를 꿈꾼다면 (2): 인터프리터, 테이큰 2

(본 매거진은 매주 월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


이 글을 읽으시기 전에 이전 글을 읽으시면 이해하시는데 더욱 도움이 됩니다.





[청춘의 덫]이란 드라마에서 심은하는 ‘부숴 버리겠어’라는 명대사를 남겼습니다.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지요. 앙갚음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복수라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접근해서 분석하기도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앞서 살펴본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처럼 어떠한 일을 당하면 앙갚음을 해주겠다, 라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보편적이고 당연한 정서지 거창하게 심리학까지 들이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소심한 복수든 거대한 복수든. 


어린 시절 명절만 되면 볼 수 있었던 성룡 영화에서도,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옛날 얘기’에서도 아버지 혹은 사부님에 대한 복수는 주요 소재였으니까요.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밀라고 한 것은 종교적 차원에서의 성자 (聖者)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당장 복수를 생각하게 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프리터]에서의 실비아 브룸 (니콜 키드먼)의 복수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가족과 한 때 사랑했던 사람까지 죽였던 사람에게 복수, 그러니까 앙갚음의 감정을 갖지 않기란 힘드니까, 신이 아닌 사람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실비아 브룸은 ‘선(善)’의 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테이큰 2]에서의 무라드 (1편에서 밀실에서 주인공 브라이언에게 전기 충격으로 죽임을 당한 마르코의 아버지)의 복수는 공감을 얻지 못합니다. 


인신매매라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다가 죽임을 당한 아들은 소위 말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드는 ‘악 (惡)의 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복수를 했어도 누구는 선(善)의 편에 서게 되고 누구는 악(惡)의 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UN에서 통역사, 그러니까 인터프리터(Interpreter)로 일하는 실비아 브룸은 어린 시절 아프리카 국적을 가진 백인 아버지와 미국 국적의 엄마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성장한 경험으로 이중 국적을 가진 독특한 배경의 금발의 미녀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성장한 아프리카는 웬만한 사람이면 알다시피 권력을 잡기 위한 내전이 끊이질 않은데, 그중에서도 모토보 지역은 (영화에서 만든 지역으로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 권력을 쟁취한 쥬와니와 그 권력에 대항하는 쿠만-쿠만과 에진 졸라가 대립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실비아 브룸이 12~13살 즈음 부모가 소유한 농장에 쥬와니가 지뢰 매설을 지시했고 부모는 동생을 학교에서 데려 오는 길에 차가 지뢰를 밟아 폭발, 오빠와 자신만 남은 채 모두 죽음을 당하면서 실비아의 쥬와니에 대한 분노는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오빠 사이먼마저 실비아 브룸이 한 때 사랑했던 에진 졸라와 함께 쥬와니에게 살해당하자 복수심은 절정을 향해 치닫게 됩니다.



[인터프리터]에서 실비아 브룸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아프리카 모토보에는 그곳에만 있는 목숨을 살려줌으로써 슬픔을 끝낼 수 있는 복수의 방법이 있다고.

누군가 살해당했다면 그 슬픔을 끝내는 익사 의식이 있는데, 밤새도록 강가에서 축제를 즐긴 후 새벽에 살인범을 수영할 수 없도록 묶은 후 강에 빠트립니다.

그리고 희생자 가족은 그 범인이 빠져 죽게 할 것인지 구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데요 죽게 놔두는 쪽을 선택하면 남은 여생 비탄 속에 살아갈 것이고 살려주면 남은 여생을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복수에 대한 상당히 독특한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복수는 슬픔을 끝내는 데 있어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결국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야 하는 싸움이 되고 맙니다. 


모토보 원주민의 의식처럼 어느 한쪽이 큰 뜻으로 용서하지 하지 않으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끝나지 않는 게 바로 복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비아 브룸은 복수를 위해 쥬와니를 죽이려고 하지요. 당연합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인간의 당연한 감정이니까요. 하지만 '모토보의 복수 의식'을 스스로 얘기했다는 점에서 보면 이율배반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비아는 선의 편으로 보입니다. 



반면 브라이언은 무라드를 죽일 수 있었던 순간에 또 다른 복수를 막기 위해 모든 것을 잊고 조용히 살아간다면 살려주겠다고 무라드를 용서해줍니다. 


하지만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쥬와니는 살았고 무라드는 죽었습니다. 


쥬와니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 넘겨졌고 무라드는 브라이언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려 했다가 되려 죽임을 당한 것이죠.


그리고 두 영화의 복수는 그렇게 끝이 납니다.


앞서 얘기했지만 보통의 사람에게 복수의 마음을 지우고 넓은 아량으로 용서를 하라는 것은 어쩌면 너무 가혹한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의 갈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복수가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가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똑같은 복수를 하더라도 누구는 선의 편에 서고 누구는 악의 편에 서게 될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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