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미국 로스쿨 입학, 1년 미루다.

미국 로스쿨 입학을 앞두고 겁이 났다. 그래서 나는 1년을 미뤘다.

by 리짓

올해 7월 초, 나는 미국 로스쿨 입학을 1년 미루기로 했다.


재작년에는 LSAT, 작년에는 입시 준비를 했다. 몇 년 동안 오로지 로스쿨 입학을 바라보고 달려왔는데, 막상 입학이 눈앞에 다가오자 이상하게 겁부터 났다. 분명 내가 원하는 길일 텐데도 불안했다. 학교가 가기 싫었다.



입시 결과를 기다리며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로스쿨과 법조계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지원 에세이를 쓸 때는 현재의 커리어와 맞닿은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고 썼지만, 사실 그건 로스쿨에 합격하기 위한 전략적인 문장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내가 로스쿨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졸업 후 어떤 커리어를 쌓고 싶은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로스쿨 이후 어떤 삶이 나에게 펼쳐질 수 있는지도 잘 몰랐다.



솔직히 로스쿨을 준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돈과 커리어 안정성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형 로펌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형 로펌 관련 책을 읽고, 그곳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물론 돈만 놓고 보면 대형 로펌만 한 곳은 없다.

그런데 나는 삶과의 균형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여성으로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간, 개인으로서 충만한 30대를 생각하면 포기해야 할 게 너무 많게 느껴졌다. 그건 감히 대형 로펌의 연봉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였다.


무엇보다 두려웠던 건 채용의 속도였다.

요즘은 1L 여름 인턴십이 바로 졸업 후의 잡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로스쿨 1학년이 이미 극도로 힘들다고 들었는데, 그 속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길을 깊이 고민할 수 있을까?

아마 휩쓸리듯 모두가 가는 길로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난하게, 덜컥 일반 로펌에 취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멈추기로 했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우왕좌왕하거나 다른 사람의 선택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내리는 선택에 대해 확신은 없어도, 자신은 있고 싶었다. 그래서 로스쿨 이후의 여러 가능성을 충분히 고민한 뒤, 각 직업의 윤곽을 어느 정도 그려놓고 입학하고 싶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입학을 1년 미루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특히 나이 때문이었다.

나는 어느새 서른둘이다.


여기서 1년을 더 미룬다는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점점 머리가 굳어가는 것 같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공부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아이를 낳는 시기도 늦어질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이는 생각보다 큰 걸림돌이 아니었다. 이미 다소 늦은 시점에 로스쿨에 진학하는 만큼, 1년쯤 더 늦어진다고 해서 인생의 궤도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1년이 마음을 정리하고 방향을 찾는 시간이라면, 그건 공백이 아니라 여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싶었다.

2년 동안 LSAT과 입시에 매달리며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 그동안 애인도 힘든 시기를 겪었고, 이제야 우리 둘 다 조금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섰다. 이 시점에서 바로 로스쿨에 간다면, 장거리 연애와 불안정한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거창한 계획은 없지만, 그냥 둘만의 일상을, 1년을 즐기고 싶다.



한때는 재지원도 고민했다.

지금 학교에 만족하지만, 내가 원하는 지역에 위치한 학교에 다시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막판까지 들었다. 특히 내 LSAT 점수 대비 입시 결과가 아쉬웠기에 끝까지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또다시 에세이를 쓰고, 결과를 기다리며 불안하게 1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로스쿨 입시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다시 지원한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확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재지원의 욕심을 내려놓고, 그냥 1년 있기로 결심했다. 차분한 마음으로 로스쿨에서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변호사로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그렇게 1년을 미루게 되었다.


그렇다면 1년 동안 나는 무엇을 할까?


첫째,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다.

회사는 이미 내가 로스쿨에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만둘 예정이던 회사에 로스쿨 입학 연기를 알렸더니, 다행히 내 사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몇 달 동안 마음이 떠 있었는데, 다시 받아준 게 너무 고맙다. 미국은 워낙 레이오프가 잦은 나라니까,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목표다.


둘째, 열심히 논다.

어차피 내년에는 죽어라 공부해야 한다. 올해만큼은 마음껏, 부담 없이 즐기자. 해외여행도 가고, 부모님 뵈러 한국에도 자주 가자.

이렇게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시기는 자주 오지 않는다. 나에게 주어진 달콤한 1년짜리 방학을 마음껏 만끽하자!


셋째, 읽는다.

처음에는 1L 예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미리 예습을 하면 너무 불행해질 것 같았다. 미리 사서 고생할 필요도 없고, 예습한다고 해서 성적이 오르리란 보장도 없다. 그래서 그 시간에 굳이 고통을 선구매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책을 읽으려 한다. 대법원에 관한 이야기, 변호사라는 직업의 다양한 모습, 그리고 로스쿨 학위로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판사, 검사, 변호사, 로스쿨 교수 등이 쓴 책들을 읽으며, 로스쿨과 법조계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쓴다.

특히 블로그. 늘 써야지 하면서 미뤄왔던 글쓰기. 이번에는 진짜 쓴다.





로스쿨 입학을 1년 미뤘지만, 이 시간이 나에게 엄청난 전환점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찾게 될 거라고도, 아주 다이내믹한 1년이 펼쳐질 거라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불안 속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적어도 마음이 조금은 평화로워져서, 내년에 로스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1년은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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