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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헤다 Apr 08. 2023

언제나 그랬듯 매화나무는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겨울이 지겨웠다. 무거운 옷을 껴입는 것도, 찌르는 듯한 찬바람도.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겪은 진한 상실감은 겨울나기를 힘겹게 만들었다. 밤은 너무나 길었고 생기 없는 풍경에 점점 지쳐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불행을 되뇌었다. 


그러다 문득, 일몰이 점점 느지막하게 시작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거리로 나서기로 했다. 절망 대신 희망을 찾아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매화나무는 제일 먼저 ‘기어코 봄이 오고야 말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신기했다. 고고한 매화나무를 바라보는데 따뜻한 봄기운이 내 몸을 순환했다. 짙은 매화 향기는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불행은 불행이고 인생은 인생이듯, 나는 삶을 지속해야만 했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나는 행복해질 자격이 충분했다.


봄기운을 느끼며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 필사모임, 재즈 피아노, 그림 그리기, 운동 등 새로운 것에 도전했다. 그 일을 겪기 전이었다면 쉽게 도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은 공존하기 마련이었다. 백 퍼센트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일은 거의 없다. 나는 이번 기회로 인생의 모든 일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내야 하고,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이었던 건, '글쓰기'였다. 내가 겪은 일을 블로그에 기록하면서 치유와 성장이 일어났다. 언어는 우리와 감정 사이에 일종의 공간을 형성하여 우리가 지나친 감정 매몰에 빠지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꾸준히 일기를 쓴 적 조차 없던 내가 글쓰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것이다. 


슬픔을 ‘슬프다’라고 쓰는 순간, 슬픔이라는 감정과 거리를 둔 채 슬픔의 언어를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상황을 언어로 정리하고 감정을 갈무리하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할 수도 있다. 글쓰기라는 생산적인 활동을 통해 슬픔을 조금씩 놓아주기 시작하면서, 더 높은 차원의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마음과 상실로 겪게 되는 모순과 동요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삶에는 그 누구도, 또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나 열망이, 우리가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치명적인 상실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를 글로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고통을 덜어내는 첫걸음이 된다. 즉 글쓰기는 인간의 내면을 갉아먹는 결핍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내가 겪은 일을 다시 돌이켜보고 의미를 해석하다가, 나는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그 과정 덕분에 진지한 자세로 내면을 돌아볼 수 있었고,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시간을 통과하자 슬플 때뿐만 아니라, 슬프지 않을 때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상실의 아픔을 겪지 않았더라면 평생 글쓰기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글로서 나의 삶을 디자인한다. 매일 나의 심연을 응시하고 그 속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끄집어내서 글로 옮긴다. 글쓰기를 내 삶에 심어버린 것이다. 


결국 글쓰기는 나에게 두 번째 삶의 기회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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