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슬픔 조금씩 놓아주기
어제 휴직을 한 기념으로 집정리를 했다. 먼저 팬트리를 열어 묵혀 있던 물건들을 꺼내서 싹 다 내다 버리는 작업을 했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고 싶은 맥시멀리스트로서 ‘언젠가는 쓰지 않을까..’라는 착각으로 쌓아둔 수많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건 마음을 정돈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다 슬픔의 밀실 속에 넣어둔 (차마 그 당시에는 버릴 수 없었던) 어떤 상실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것은 2장의 초음파 사진과 임신 축하 선물로 받은 신생아용 손싸개였다.
어떤 슬픔은 때로 우리의 세계 속 시간을 늦추고 몸과 마음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겨우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그 이별의 순간이 다시 한번 내 감정을 동요하게 만든다. 아니, 잊고 지냈다고 했던 방금 문장은 틀렸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슬픔은 애초에 극복 가능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절대 지워지지 않는 각인을 남긴다. 그저 마음속에 묻어두는 것만 가능할 뿐이다.
고밀도로 압축되어 있던 거대한 슬픔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올 수도 있다. 나는 앞으로 상실이 남긴 향수를 마음에 깊이 품고 그 흔적을 내면에 간직하고 살아갈 것이며, 때때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득 눈물과 함께 물건들을 버렸던 그 장면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이 암울한 상황은 절망스럽기만 한 것일까? 이 모든 것은 꼭 필요한 애도의 과정이며,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생산적인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나'라는 존재의 또 다른 모습에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삶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하여 상실로 인해 생겨난 공허함은 채워져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결핍을 채우려는 충동을 동기삼아 움직인다. 즉, 공허함에 맞서 만족감을 얻을 만한 다른 방안들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결국 새로운 기회를 만나게 되고 다양한 활동에 새로이 에너지를 쏟아붓게 된다.
이러한 애도의 과정은 어쩌면 지금은 알지 못할 새로운 행복으로 향하기 위한 기회일 수도 있다. 슬픔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동요를 잠재워 우리가 더 높은 자기 인식의 단계에 들어설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무척 괴로울 수 있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대체할 수 있게 되는 순간, 분명 현재는 과거를 무색하게 만든다.
여러 기회를 찾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큰 실패를 겪었어도 무조건 잃기만 하는 건 아니구나. 나는 부서지고 무너지고 괴로웠지만, 그 시간 동안 성장했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커다란 상실을 겪고 난 뒤의 나는 전과 같은 내가 아니다. 오히려 상실을 겪고 슬픔을 소화해 낸 일련의 과정들은 내 삶의 의미를 찾는 경험이었다. 상실은 성장의 핵심이었다.
마르쿠스는 "상상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라고 말했다. 나는 상실의 대안으로 찾아낸 글쓰기를 통해 일상을 재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