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말입니다
확실한 소속감에 안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맞다. 바로 나다.
그러나 내가 이른바 '소속 강박'에 시달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어쩌면 날 때부터 주어진 운명이 아닐까 싶은데, 소위 말하는 '빠른 년생'이기 때문이다. 연말연시마다 나이 이슈로 화두에 오르지만, 특히 앞자리가 바뀌는 해면 그 논란이 다소 거세진다. 그리고 나에게는 작년 이맘때와 올해가 딱 그런 해다. 올해 세는 나이로 서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모를 수도 있어 잠깐 설명하자면, 빠른 년생 제도란(정확한 제도명은 모른다) 이듬해 1월~3월에 출생한 아이는 그전 해 아이들과 같은 해에 초등학교 입학이 가능한 제도로, 2003년생부터는 별도로 조기입학 신청을 해야 가능한 것으로 바뀌었다가 이후 아예 폐지되었다. 나는 적어도 2003년보다는 훨씬 전에 태어났으므로 별도로 신청을 하지 않아도 입학이 가능했다.
발육이 또래에 비해 꽤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하셨던 걸까, 부모님은 만 6세인 나를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결정이 충동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1년 전 생일에 찍은 사진에는 아주 큰 글씨로 '7살 생일'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그때부터 이미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 예정인 아이였던 것이다.
아주 엄밀히 따지면 7살이었던 나는 그해 3월 1일부터 8살로 살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서 관계를 형성할 때 대한민국만큼 나이를 따지는 나라가 또 있을까. 그런 나라에서, 학교라는 인생 첫 사회 진입에 있어 그때 이미 내 나이를 정해버린 것이다. 다행히 '빠른' 치고 왜소하거나 하진 않았기에 덩치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한 적은 없다. 덩치가 작았다면 애초에 입학도 하지 않았겠지만.
초등학교, 처음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으나, 배움이 늘어감에 따라 논란도 함께 늘어났다. 학교에서 숫자와 연도를 배우면 너는 왜 연도가 다르냐는 질문을 받았고, 십이간지(띠)를 배우면 너는 그래서 무슨 띠냐는 질문을 받았다. '형이라고 해봐', '누나라고 해봐'는 당연히 뒤따라왔다. 그때마다 정확한 이유도 모르면서 해명을 해야 했다. 해명의 연속이었다.
'띠'의 경우 신정(양력 1월 1일)을 기준으로 나뉘지는 않는다. 음력 설이 기준이라는 말도 있지만 만세력 기준으로는 '입춘'을 기준으로 띠를 구분한다. 즉, 매년 보신각에서 울려 퍼지는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푸른 용의 해가 밝았습니다!'라는 식의 멘트는 그저 신년 퍼포먼스일 뿐 출생한 아이의 띠와는 별개다.
나무위키에 '빠른 생일'을 검색해서 스크롤을 내리면 장점이 딱 2가지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대학입시 재수를 부담 없이 할 수 있다'이다(단점은 몇 개인지 세다가 포기했다). 실제로 부담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마치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재수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다. 빠른 년생 재수 입학생이라, 생각만 해도 복잡하지 않은가? 이미 초중고 12년 동안 빠른에 시달렸던 나는 재수까지 겹치는 바람에 입학 전부터 지레 겁을 먹었다. 다행히 착한 선배들과 동기들을 만나 큰 문제는 없었으나, 나는 같은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한 학번 위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제로는 같은 나이인 동기들 사이에서도 반쯤 걸쳐 있는 사람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지만, 어느 쪽에도 명확하게 속하지 않았다.
그런 애매한 경계에 대한 갑론을박은 사회에서는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다. 보통이라면 반가워야 할 또래가 불편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점차 또래를 사귀는 것도 어려워졌는데, 그 사람이 빠른에 대해 어떤 입장인 지 사전에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민감한 사람이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얼마 전 정부에서 출시했던 신제품인 '만 나이'는 늙기 싫은 이들의 한풀이와 정책에 대한 조롱섞인 ‘밈’으로만 떠돌 뿐 실생활에서는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앞서 말한 '빠른 제도의 기원'과 '띠 구분법'을 포함하여, 이렇게 나이와 관련한 몇 가지를 알아보고 알려줘도 '그래서 어쩌라고 너 빠른 이잖아' 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것이 현실이다. 대충 계산해 봐도 빠른 년생보다는 제 나이에 학교를 들어간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절대다수가 내 편이므로 마음 놓고 공격하기도 좋다. 특히 요즘처럼 솔직함과 무례함을 구분 못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날 선 말투로 공격받기 더욱 쉽다. 물론 상황에 따라 나이를 바꾸는 얌체 같은 빠른 년생들이 있지만, 나이를 명확하게 알려줘도 족보 브레이커라는 둥, 그냥 빠른이 문제라는 둥 가만히 있다가 욕먹는 경우가 많다. 제도의 폐지는 2004년생 이후 출생자는 구제하였을지 몰라도 이미 빠른에 속해버린 이들은 방치 상태가 되었다.
어째서 유독 90~00년 대생들이 빠른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한 지도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80년대 초반까지도 출생일이 호적과 다른 경우가 가끔 있었고, 그밖에도 가정형편을 이유로 입학을 이르거나 늦게 시키는 경우, 집에서 음력 생일을 따지는 경우 등으로 같은 학년 내에서도 출생연도가 다른 경우가 많아 '그냥 다 친구'하기로 하는 사례가 잦았던지라 상대적으로 '같은 학년 다른 나이'에 익숙하며, 90년대 이후로는 그러한 사례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그럴 것이라는 의견이 가장 신빙성 있었다.
당신이 빠른 년생이건 아니건, 여기까지 읽고 '거 혼자 되게 심각하네'라고 생각했다 해도 당신은 물론 정상이다. 그러나 사람이 20~30년 넘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싸움을 하다 보면, 아무리 작은 갈등이라 해도 피하고 도망치고 싶어 질뿐더러 나중에는 피아식별조차 어려워진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런 싸움에 지친 지 오래되었다. 살면서 새로운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지 않는 이상 아마 평생 이럴 것이다. 내가 적응해야지 뭐.
연말을 맞아 전국의 빠른 년생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응원을 남긴다.
유독 말이 좀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