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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Nov 17. 2020

우리 안에 있습니다.

있습니까?

우리 속 염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도 나를 유심히 바라본다. 

대체 누가 누구를 구경하는 걸까. 

철창에 갇힌 게 염소인지 나인지 헷갈린다. 

내가 더 큰 세상에 있지만, 마음의 우리는 염소 쪽이 더 넓다. 

그는 느긋하게 먼 산을 바라본다. 

촘촘한 우리에 살찐 나는 상상만 했던 행동이다. 

관리인 아저씨가 깜냥이에게 단풍잎을 주며 염소를 가리켰다. 

염소는 단풍잎을 맛있게 먹었다. 

염소도 가을을 먹는다. 

염소 발밑에도 붉은 잎이 산들산들 흔들리는데 그는 우리만 보았다. 

그렇다. 진짜 배고픔이 아니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쉬는 재미처럼 보였다. 





불현듯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받는 것에 익숙한지도 모른다. 

가르쳤던 지철이가 떠올랐다. 

늘 나를 지켜보던 아이였다. 

공부하라고 해야 교과서를 보고, 밥도 먹으라고 해야 급식판에 손을 댔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면 바지에 싸버리고 말았다. 

늘 내가 허락해주기를 기다렸다. 

지철이는 졸업할 때까지 숭덩숭덩 작은 성공을 꿰매었다. 

스스로 일구지 못하는 삶은 멀리 있지 않다. 

나도 마찬가지다. 





부끄럽게도 독립의 첫 발자국을 찍은 날은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몸과 마음은 힘들었지만, 내가 일군만큼 수확하는 즐거움을 얻었다. 

자기 힘으로 해내는 기쁨이 쌓이면서 진짜 하고 싶은 일도 생겼다. 

수동적인 삶의 모래는 그때부터 서서히 샜다. 

삶의 주인의식이 생기자 나와 관련된 모든 일을 조율하게 되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자기 계발서> 저자 미하우 스타비츠키가 말한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100퍼센트 당신 자신의 책임이다”라는 문장을 지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곤충 중에서 뒤영벌을 좋아한다. 

벌은 꽃이 간절하다. 

하지만 겨울잠에서 깬 벌에게 꽃이 늘 기다리는 건 아니다. 

꽃이 피지 않는 나쁜 시기에 깰 수도 있다. 

암흑 같은 세상이라고 날개를 접었다면 뒤영벌은 멸종했을 것이다. 

역시 그는 꽃을 정말 좋아했다. 

좋아하면 행동하게 된다. 

굶주린 벌은 잎사귀에 정성을 다해 상처를 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평소보다 한 달 빨리 꽃이 핀다. 

주체성은 자연의 흐름마저 바꾸어 세상의 꽃을 쟁취한다. 

뒤영벌이 상처를 낸 잎을 보면 내 귓불이 빨개진다. 

그는 계절에 상관없이 겨울잠을 자는 내 마음의 잎도 무는 것만 같다. 

지금 적극적으로 하는 진짜 일은 몇 가지나 될까? 

소극적인 일이어도 내 꿈 지도에 떳떳이 기록할 수 있다면 내겐 진짜 일이다. 

우리에 갇힌 염소처럼 주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면 그는 스스로 원하는 인생을 설계하고 좋아하는 꿈을 향해 걷는 삶을 동경한다고 말한다. 

겸손한 글이지만 한편으로 그런 행위가 쉽지 않다는 의미로도 느껴졌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이루어진 세상이라면 조금은 내 뜻대로 움켜쥐는 것도 필요하다. 

주는 대로 받아먹는 손님보다 주도적으로 찾아 먹는 주인이 되길 소망한다. 

그냥 주면 시럽을 발라달라고 요구하자. 

안 발라주면 혼자 힘으로 캐나다산 메이플 시럽을 잔뜩 짜자. 

당당히 가을을 직접 먹노라. 

단, 첫술부터 크게 먹으면 체하니 지철이처럼 작은 성공부터 차근차근 책임지면 된다. 

돈키호테가 소리친다.


누가 미친 거죠?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건가요,
아니면 있는 그대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이 미친 건가요.


위대하고 전지전능한 내일의 나는 이 글을 꼭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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