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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Nov 18. 2020

내 이야기를 하는 힘

쥔 손을 펴보세요.

5살 깜냥이는 자주 공룡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교훈 있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점점 창작의 샘은 마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활과 관련된 소재를 넣었다. 

아이가 양치질을 싫어한다면 양치질을 거부하는 공룡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의 경험과 비슷한 일이 소재가 되니 관심이 높았다.

깜냥이가 “나랑 똑같네”라고 중얼거리면 내심 뿌듯했다. 

행동이 바뀌는 것은 덤이었다. 

직접 말하면 잔소리가 되지만 “아까 공룡이 양치질을 안 해서 어떻게 됐지?”라고 질문하면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른이인 나에게 적용한 포인트도 있다. 

제3의 나를 만드는 것이다. 

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통제하는 데 유리하다. 

예를 들어,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보면 “이 선생, 괜찮아? 다음번에 잘하면 돼. 여기만 고쳐보는 건 어때?”라고 말할 수 있다. 

게으름을 한 잔 마시고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면 “에고. 많이 힘들었구나. 그래. 그럴 수 있어. 조금만 쉬어. 다음에는 내가 나설게.”라고 할 수도 있다. 

좋은 일은 내가 칭찬받고 괴로운 일은 또 다른 내가 뒤집어쓰는 구조이다. 

이렇게 되면 나를 멀찌감치 떼서 볼 수 있고 남의 일처럼 기름기 없는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내가 글을 쓰는 하나의 동기와도 맞닿아 있다.





요즘 깜냥이는 창작하는 동기가 생겼다. 

“공룡 이야기를 들려줘”가 아니라 “이빨이 썩어서 울다가 날개 달린 칫솔을 잡는 공룡 이야기해줘”라고 한다.

이야기의 주제와 내용의 뼈대를 잡아준다. 

아이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에 가까운 미래를 향한 세 가지 계획을 세웠다. 

첫째, 가족이 모여 이야기를 꺼내고 좋았던 부분을 나눈다. 

토론까지 이어지면 금상첨화다. 

둘째, 아이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다. 

말을 그림으로, 그림을 말로 나타내는 것은 풍부한 표현 발달에 좋다. 

셋째, 아이가 만든 그림책으로 동화 전시회를 연다. 

자기 작품에 더 많은 애착을 갖게 되고 다음 작품의 아이디어가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경험을 주고 싶은 걸까? 

깜냥이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표현을 결과물로 내는 사람은 자아가 또렷하다. 

그러면 행복도 쟁취하기 쉬운 법이다. 

부모는 스스로 부족하고 억압된 욕구를 정반대의 형태로 아이에게 푼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 너는 그렇게 살아라”하는 생각이 아이를 만든다. 

나는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한 아버지 아래서 착하기만 한 아들로 25년을 살았다. 

뺨, 머리, 종아리, 손바닥. 참 맞기도 많이 맞았다. 

그 당시 체벌이 흔한 시절이지만 여린 나에게는 극복할 힘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정말 무서웠다. 

그는 나의 많은 일을 결정했고 난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은 아버지가 달라졌지만, 그때는 그랬다. 

지금도 나는 어른을 보면 심장이 뛰고 얼굴이 굳는다. 

나도 어른이면서 그때마다 어린이로 돌아가나 보다. 

돌아서면 허탈한 웃음만 짓곤 한다. 




그 순간부터 이야기를 주무를 수 있다.




내 아이는 자기 생각을 당당히 표현했으면 한다. 

내 삶을 책임지고 진두지휘하는 재미를 느꼈으면 한다. 

그러면 행복도 스스로 조율할 수 있으리라. 

그게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두 번째 선물이다. 

이야기가 무거워졌으니 며칠에 걸쳐 들은 깜냥이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어본다. 

주제는 부끄러움이고 내용은 짧게 요약했다. 


첫 번째 이야기. 

공룡이 점프를 콩콩 뛰었대. 

그랬더니 옷이 벗겨졌대. 

공룡은 부끄러웠대. 


두 번째 이야기. 

공룡이 길을 가는데 태풍이 불었대. 

그랬더니 옷이 벗겨졌대. 

그래서 공룡은 부끄러웠대. 


세 번째 이야기. 

공룡이 수영했대. 

그런데 상어가 나타났대. 

상어가 옷을 벗겼대. 

그래서 공룡은 부끄러웠대. 


네 번째 이야기. 

해바라기가 똥을 쌌는데 이렇게 뿌렸대. 

그래서 공룡 옷에 묻었대. 

공룡은 어쩔 수 없이 옷을 벗었대. 

그래서 공룡은 부끄러웠대. 





요즘 이런 뼈대를 잡고 내게 다시 말해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성 관련 문제일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니었다. 

부끄러움과 성에 관한 호기심이어서 소중한 몸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깜냥이가 매번 새로운 이야기라고 말하면 웃음이 났다. 

언제나 결론은 옷이 벗겨지고 공룡은 부끄러울 것이다. 

어느새 기승전결 중 ‘기’만 바뀌는 이야기의 묘미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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