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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Nov 16. 2020

나는 어떤 '괜찮아'를 주로 쓰나요?

어른이 되는 조건

아침부터 사건이 터졌다. 

새벽 5시에 인기척이 들려 서재 문을 여니 벌거숭이 깜냥이가 있었다. 

아내는 피곤한 얼굴로 내 눈을 피했다. 

바쁠 것 같은 날에는 여지없이 아이가 깜짝 이벤트를 해준다. 

후다닥 사건 현장으로 갔다. 

그곳은 이미 둑이 터졌고 이불은 다 젖었다. 

급히 오줌을 머금은 겨울 이불을 끙끙대며 옮겼다. 





문제는 물과 같아서 잘 막아두지 않으면 다른 곳까지 적시기 십상이다. 

얇은 요가 젖었다. 

최후의 보루였던 방수 요도 젖었다. 

패드 덮개에도 영역이 잘 표시되어 있었다. 

이젠 안에 있는 패드의 생존만 남았다. 

빠르게 덮개를 빼고 패드에 코를 댔다. 

킁킁거릴 때마다 지린내가 폴폴 올라온다. 

이럴 수가! 일말의 기대마저 허무하게 무너진다. 

대체 어떻게 둑이 터지면 코어까지 단번에 닿을 수 있을까. 

유일한 나의 새벽 시간이 한줄기의 물과 함께 사라졌다. 

두 개의 베개와 온갖 이불 그리고 덮개를 쌓으니 거대한 빨래 산이 되었다. 

내 잘못도 아닌데 짜증 난 아내의 눈치가 보인다. 

각자 말없이 이불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새벽부터 출근할 때까지 빨래와 탈수는 이어졌다. 





속세의 시간을 초월하는 능력자가 된 기분이다. 

평소에는 하나 하기도 힘든 시간에 두세 가지를 거뜬히 해낸다. 

그런데 오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깜냥이의 코에서 빨간 물이 터졌다. 

자주 코피가 났지만, 하필 오늘이라니. 

월요일 아침부터 가속도에 가속도가 더해졌다. 

늘어나는 중력에 얼굴이 찌그러지고 허탈한 웃음만 났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코피는 멎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만 세 숟갈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바로 나갔다. 





유치원에서 아이와 작별 인사를 하는데 조금 전 일이 영화처럼 흘러갔다. 

찝찝함을 씻고 살금살금 내 곁으로 오는 깜냥이가 떠올랐다. 

거기서 내가 할 대사를 까먹었다. 

아이에게 한마디를 해야 했다. 

바쁘다고 하지 못한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다시 만날 때라도 꼭 말해야겠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괜찮다는 답은 많은 마음을 담는다. 

“이해해”“견딜게”“사랑해”“그렇게 생각해줘”“별일이야”“용서할게”“별일 아니야”“좋아”“관계없어”“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그럴듯해”“무난해”“괜찮지 않아”“용서할게”로 쓰인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잘 지내느냐”“괜찮으냐”라고 물을 때마다 “그렇게 생각해줘”를 단 “괜찮아”를 남발한다. 

사실 사랑하는 엄마와 이별한 53일짜리 딱지가 괜찮을 리 없다. 

그런 안부를 하도 들어서 한때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가 그의 입장이 되어도 다른 대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마음으로 말을 꺼내는지 아니까 요즘은 더 씩씩하게 답하곤 한다. 




*'괜찮아' 수화: 소지를 턱에 몇 차례 두드리는  행동으로 새끼손가락을 깨무는 것처럼 작은 일에 개의치 않다는 의미가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괜찮다는 말을 잘 쓰는 것부터 시작된다. 

세 가지 형태의 “괜찮아”를 외친다. 

첫째,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며 스스로 위로할 수 있다. 

둘째, 때론 사랑하는 사람이 슬퍼하지 않게 혼자만 아프고 만다는 심정으로 “괜찮아”를 외칠 줄 안다. 

셋째, 내가 한 괜찮다는 말에 책임지기 위해 진짜 괜찮아지도록 노력한다. 

이런 조건을 갖추면 어른 가지에는 사계절마다 꽃이 핀다. 

나도 향기 나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런데 왜 코에서 지린내가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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