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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Dec 23. 2020

새벽에 피는 꽃

산책뒤끝記

새벽은 세상이 열리는 경이로운 시간이다. 

해가 일궈낸 하루 앞에서 우리는 깨고 잔다. 

공원에 발 도장을 몇 걸음 찍다가 하늘을 보니 벌써 먼동이 트려 한다. 

하늘 밑자락이 붉고 꺼멓다. 

내가 아닌 반대쪽 세상에서 비추는 빛을 하염없이 보았다. 

형체만 보이는 그림자 세상에 몇 번이고 마음을 썼던가. 

난 아직도 새벽에 산다. 

세세하게 보지도 못하면서 그게 인생이라고 그럴듯한 묘사만 쏟아낸다. 

단 한 번도 내가 빛인 적이 없다. 

수치심에 도망치듯 편한 길을 뛰었다. 

부끄러움을 아는 그림자는 나보다 더 빨리 달아난다. 

피터팬처럼 그림자를 잃을까 봐 그림자 발끝을 정신없이 좇아갔다. 

불행히도 난 그림자를 꿰매 줄 웬디가 없다. 

겨울바람이 양 볼을 빨갛게 문지른다. 





그래도 등은 따스하다. 

빛을 등지니 나도 이제 밑은 붉고 형체만 보일까? 

어쩌면 가장 긴 새벽은 내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을 함께 할 새벽 꽃이라도 피면 좋으련만. 

동장군 시샘에 새벽 풍류를 즐기는 꽃은 피난 갔다. 

대신, 공원과 어울리지 않는 굴착기가 동장군 영역을 한 움큼 파낸다. 

시끄러운 소리는 나를 이성적으로 만든다. 

미간이 주름을 세 개쯤 수놓자 연신 입김을 내뿜으며 움직이는 사람이 보였다. 

있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피는 새벽 꽃이. 

활짝 핀 사람꽃은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붙는다. 

이번에는 그림자가 뒤에서 바삐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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