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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Feb 10. 2021

별명이 있습니다.

메마른 남자로 불리는 남자 이야기

별명은 어릴 적 나를 따라다니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물론 유치하고 시답지 않던 별명의 유통기한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사라졌다. 

그렇게 별명이라는 낱말은 고대 유물이 되어 땅에 묻혔지만, 다시 발굴한 건 아내였다. 

결혼하면서 수도 없이 나를 대표하는 별명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메마른 남자’였다. 

나한테는 특이한 이력이 있었다. 

우산을 챙기지 않아도 비에 흠뻑 젖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연은 나이만큼 겹치면서 사례가 셀 수 없이 많아졌다. 

물론 별명을 강탈당할 큰 위기도 있었다. 





친구들과 동해로 여행 갔을 때였다. 

겨우 잡은 일정이었는데 하필 전국에 내리는 폭우가 우리를 괴롭혔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는 비바람에 운전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는 내내 비는 그친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이건 자신감이 아니라 객기에 가까웠다. 

내가 가는데 비가 올 리가 없다고 믿었다. 

강원도로 가는 마지막 터널을 지나자 하늘은 비 대신 햇빛을 쏟아냈다. 

나에게도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비 온 뒤에 보이는 청명한 바다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다. 





하늘을 너무 말려서 고생한 적도 있다. 

섬에서 근무했던 시절에는 평소와 달리 심한 가뭄이 들어 주민이 힘들어했다. 

뉴스에 나올 정도였다. 

물론 내 잘못이 아닌데 괜스레 죄송했다. 

배우 이승기 씨는 자연재해와 관련된 인간 부적으로 통한다고 한다. 

그가 대한민국에 있을 때면 태풍이 비껴갔다니 참 신기한 우연이다. 

내가 언제까지 메마른 남자 타이틀을 유지할지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사람들이 재해로 고생하지 않도록 필요할 때 팍팍 비를 말렸으면 좋겠다. 





비를 멈추는 자에 이어 메마른 남자와 관련된 다른 망상도 밀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메마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망상이다. 

가장 인간미 없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촉촉한 인간미를 주변에 퍼뜨리는 게 내 사명이다. 

좋은 사람의 평균치를 올려 내가 제일 메마른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람이다. 

그런 의미로 교사나 작가의 삶은 지금의 나와 잘 어울린다.





어른이 될수록 수식어가 나를 대신하곤 한다. 

그건 별명과 또 다르다. 

형형색색 수식어도 좋지만, 그곳에는 존재의 한계가 공존한다. 

별명은 나의 한계를 초월한다. 

별명을 진지하게 고르는 사람은 없다. 

허물없이 편하게 부르고 바꿀 수 있다. 

별명은 마음 가는 대로 내게 붙는다. 

탄생하기까지 스토리가 있고 나의 한 조각과 동기화 과정을 거친다. 

무엇보다도 나랑 잘 어울려야 제맛이다. 





<놀면 뭐하지?>에 나오는 유재석 씨가 여러 서브 캐릭터를 두는 것처럼 별명대로 다른 내가 되는 게 좋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별명이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투자하고 내가 연기하고 내가 찍은 영화임에도 엔딩 크레딧에 올라오는 역할은 평범한 ‘사람 1’이라면 그것만큼 서운한 게 또 있을까? 

‘유치한 별명’이 어린 나에게 붙는 거라면 ‘유지한 별명’은 어른 나에게 붙어야 할 것이다.

*유지有志하다: 어떤 일에 뜻이 있거나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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