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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Aug 11. 2021

다리 짧은 강아지

단편동화





처음은 똑같았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었고 졸리면 잤다. 내 꼬리를 잡으려고 돌다가도 사람이 지나가면 저 사람이 내 주인일까 하고 설렜다. 어느 날 익숙한 종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들어왔다. 폴짝폴짝 뛰는 나와 달리 게으름뱅이 찰스는 심드렁하게 하품을 했다. 동물병원의 터줏대감인 그는 세상을 모두 아는 눈으로 누워만 있었다. 열심히 고개를 돌리던 사람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머리털을 넘기더니 고개를 숙여 우리를 뚫어지게 보았다. 큰 눈동자는 찰스를 보다가 내 쪽으로 슬금슬금 옮겨갔다. 기울어진 고개 탓인지도 모르겠다. 밝게 웃으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내 앞을 두들겼다. 나는 배를 뒤집고 발버둥 치며 응수했다.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번쩍 든다. 깜짝 놀랐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한 촉감에 나도 모르게 꼬리가 흔들렸다. 처음 맡는 풀 향기는 연신 코를 찔렀다.


“이제 넌 보리야.”


드디어 내게도 주인이 생겼다. 주인을 만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찰스가 그랬다. 이제는 그와 이별을 고해야 한다. 고개가 저절로 그에게 돌아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찰스는 벌떡 일어나 유리벽을 박박 긁었다. 그는 온몸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찰스가 열심히 움직이는 것은 처음 본다. 그제야 그가 일부러 게으름을 피웠다는 걸 알았다. 생각 깊은 나의 친구, 안녕. 찰스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떠나서 슬펐다.  자동차에 올라타자 늘 똑같던 동물병원의 경치가 쉴 새 없이 바뀌었다. 내 머릿속 세상이 한꺼번에 넓어지는 기분이다. 모든 게 어색하고 두렵지만, 이제는 익숙함을 소화해야 하는 시간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시끄러운 소리는 점점 사라지고 흙냄새가 곳곳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처음 맡는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끙끙 소리를 내자 주인이 나에게 말했다.


“처음이라 무섭지? 나도 귀농은 처음인데 잘 부탁해.”


좁은 길을 천천히 달리던 차는 낯선 집에 멈추었다. 문을 열자 눈앞에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유리방처럼 막히지도 않았고 뛸 때마다 주변 냄새와 바람이 느껴졌다. 땅은 햇살을 가득 머금어서 포근하고 따사로웠다. 이곳이 내가 살 곳이라니! 나는 코가 닳도록 냄새를 맡고 또 맡으며 지금을 받아들였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감나무에 감이 세 번이나 열렸다. 오늘도 나는 동물병원 찰스가 연기했던 것처럼 바닥에 배를 대고 있다. 끙끙 앓아도 알아주는 이는 없다. 주변은 눈만 끔뻑여도 자랐지만 내 한쪽 다리만큼은 전혀 자라지 못했다. 울적한 나는 언젠가부터 좋아하는 모험을 포기했다. 짧아진 건 다리 하나지만 나는 모든 것이 변했다. 가까이 있는 닭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거칠기로 유명한 치킨 아저씨다.


“절뚝 다리로 밥만 축내는 녀석아. 넌 왜 이 집에 있는 거야?”

“아저씨랑 말하고 싶지 않아요.”

“자, 여기 보라고. 우리 자기들이 낳은 알을 봐.”


자랑스럽게 펼친 날개 너머에는 갓 태어난 알이 여러 개 보였다. 주인이 이곳에만 오면 항상 웃었던 게 떠올랐다.


“필요하니까 존재하는 거야. 그런데 넌? 존재는 그럭저럭 하는데 이 집안에서 필요한 게 맞아?”

“저도 필요해요!”


화가 난 나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빠르게 뛰지 않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밖으로 나서자 진한 소똥 냄새가 풍겨왔다. 우리 집 근처에 소끼리 모여 사는 작은 동네가 있다. 최근에 막순이를 낳은 밀크 아주머니가 입을 열심히 오물거리며 식사 중이다. 나는 힘없이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그래, 우리 막순이랑 놀래? 어제 막순이가 뛰는데 보통이 아니더라. 다리가 튼실한 게 나를 똑 닮았어. 호호호. 들어 봐. 소리도 우렁차지? 이게 다 내가 막순이를 뱃속에 있을 때부터…”


밀크 아주머니는 자랑하느라 숨을 쉴 줄 몰랐다. 한참을 붙잡혔다. 겨우 막순이에게 다가가자 막순이는 환히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우리는 신나게 돌다가 콩 하고 넘어지는 놀이를 했다. 잊었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를 따라오라고 부지런히 걸었더니 막순이가 쩔뚝거리며 따라왔다. 뒤에서 밀크 아주머니가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막순아, 나쁜 거 따라 하면 못써요!”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내 잘못이 아니지만 내가 문제인 것 같았다.

“보리야, 미안한데 당분간 우리 애랑 안 어울렸으면 좋겠구나. 배움이 중요한 시기라서.”

“네…….”


나는 다리만큼 짧은 말을 남긴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해가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갈 때 주인은 나를 찾았다. 잊고 있었던 손길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하늘하늘한 옷과 선글라스를 보니 멀리 가는 게 분명했다. 주인은 나를 번쩍 들어 차에 태웠다. 둘만의 시간이 꿈만 같았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꼬리를 덩달아 휘저었다. 세상은 쉴 틈 없이 새로 바뀌었다. 사방이 익숙하지 않은 냄새로 가득 찰 무렵 주인은 문을 열고 나를 내려주었다. 예전에 함께 간 곳은 아니었지만, 발그스름한 노을이 비치는 물가는 아름다웠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꾹꾹 눌러가며 천천히 주변을 모험했다. 936,270번째 냄새를 찾아서 뿌듯했다. 주인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맛있는 음식을 놓아주었다. 기분이 좋아서 음식 주변을 빙그르르 돈 다음에 허겁지겁 먹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부르릉~”


그때 차 시동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차는 슬금슬금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나를 두고 갔어요.”


나는 실수한 주인에게 말해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뛰었지만 차는 점점 더 빠르게 달릴 뿐이었다. 지저귀는 새소리는 사라지고 차가 토해내는 울음소리만 가득 찼다. 나는 먼지 속으로 풀썩 쓰러졌다. 길 사이로 펼쳐진 꽃밭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는 이미 꽃잎보다 작아졌다. 나를 놓고 갈 만큼 급한 일이 있는 걸까? 잠시 갔다 오는 걸까? 나는 길을 계속 바라보았다. 낯선 곳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로운 오늘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이 등을 자꾸 간지럽힌다. 작은 소리에도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빼도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 때문에 주름이 생긴 물처럼 얼굴이 구겨졌다. 다시 몸을 웅크린 채 길만 바라보았다. 여기서 어울리지 않는 건 나뿐이다. 슬픔에 잠길 때마다 옆에서 개구리가 크게 울어댔다. 머리통이 울려서 지끈지끈 아플 지경이다.


“그만 좀 울어!”


참다 참다 소리를 지르자 겁먹은 개구리가 앞다리를 들고 뒤집어졌다.


“미안,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아….”

“괜찮아. 내가 잘 놀라. 괜찮으면 우리 마을에 놀러 올래? 함께 있으면 좀 나아질 거야.”


개구리의 말에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구리를 따라 무성한 풀 사이로 내려가자 연못이 눈에 띄었다. 아담했지만 모두 함께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그만 풀에 걸려 연못 앞까지 데굴데굴 굴렀다. 쿵 소리와 함께 풀과 곤충이 나풀나풀 하늘을 날았다. 깜짝 놀란 개구리들은 일제히 감정을 표현했다. 큰 개구리는 눈을 가렸고, 작은 개구리는 물속으로 퐁당 빠졌고, 무늬 없는 개구리는 풀 뒤에 매달렸고, 점박이 개구리는 뻣뻣하게 굳었고, 마른 개구리는 입을 크게 벌렸고, 통통한 개구리는 입을 막고 볼을 한껏 부풀렸다. 마을에 초대해준 개구리는 또다시 앞다리를 들고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미안해. 놀랐지?”

“괜찮아. 여긴 놀라는 개구리 마을이니까 이게 당연한 거야.”

“그래? 그런데 별일 아닌데도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개구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개굴개굴 울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개구리가 갈댓잎에서 내려와 입을 열자 순간 조용해졌다.


“흠, 미리 놀라면 실제로 벌어진 일이 때론 다행스럽게 느껴진단다. 아무리 큰일이라도 더 크게 놀랄 수만 있다면 그건 작은 사건에 불과한 거지. 잘 놀랄 줄 안다면 더 상처 받을 일도 더 겁먹을 일도 없는 거란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


개구리들은 불안하게 주변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커다란 돌 하나가 연못 한가운데에 풍덩 빠졌다. 개구리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놀랐다. 큰 개구리는 물이 튀어서 놀랐고, 작은 개구리는 풍덩 소리에 놀랐고, 무늬 없는 개구리는 큰 돌에 놀랐고, 점박이 개구리는 풀이 흔들려서 놀랐고, 마른 개구리는 다른 개구리들이 놀라서 놀랐고, 통통한 개구리는 돌이 자기에게 떨어지는 줄 알고 놀랐다. 나를 데려온 개구리는 아직도 뒤집어진 채였다. 그리고 할아버지 개구리는 돌과 함께 사라졌다. 미리 놀라고 걱정하고 조심하면 숨은 붙어있겠지만 사는 건 아닌 것 같다. 풀을 헤집고 사람 냄새가 나는 길로 올라섰다. 아이가 나를 보고 살짝 당황했다가 짓궂은 표정을 짓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떠났다. 꼬마가 던지는 돌이 아파도 참았다. 놀라면 더 던질 것 같았다. 지금은 돌아올 수 없는 주인 대신 내가 주인을 찾을 시간이다.      







강가를 지나자 긴 도로가 나왔다. 쌩하며 차가 지나가자 주인이 떠올랐다. 주인이 운전하는 차와 똑같았다. 놓치지 않으리라. 전력을 다해 뛰다가 넘어졌다. 차는 다시 꽃잎보다 작은 크기로 사라졌다. 숨을 헐떡이며 쉬는데 바로 뒤에서 아찔한 소리가 들렸다. 돌진하는 차가 급히 옆으로 피하더니 쏜살같이 지나쳤다. 여긴 위험하다. 어쩔 수 없이 산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제법 산이 험했지만 오를만했다. 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대도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잎이 떨어지는 나무에 나오지 않는 오줌을 쥐어짰다. 뒤늦게 코에서 풀과 꽃과 흙의 냄새가 뒤따라왔다. 그래. 여긴 안전하다. 그것도 잠시, 이상한 낌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방에는 검은 그림자가 나를 에워쌌다. 하나같이 마르고 어두운 낯빛을 한 친구들이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위협적인 이빨에 비해 눈은 슬퍼 보였다. 그들 사이로 머리 큰 형이 다가오더니 큰 이빨을 보이며 내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위협했다.


“야! 누가 우리 마을에 코를 들이밀어?”

“죄, 죄송합니다.”

머리 큰 형은 조그만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쯧, 너도 버림받았구나. 나쁜 인간들.”

“아니에요. 깜빡하고 저를 두고 갔어요. 제가 찾을 거예요.”

“으하하! 누가 누굴? 올해 들은 이야기 중에 제일 웃겼다. 됐고! 갈 곳이 없으면 우리 마을에서 살아. 썩어빠진 인간이 없는 이 땅이 힘들어도 평화롭다.”


머리 큰 형은 턱 하니 고기 한 점을 건네주었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달려들었다. 잊었던 허기가 배를 쥐어짰다. 산은 금세 어두워졌다. 어스름한 저녁이 되자 그들은 모여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목줄을 칭칭 매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는 인간들.”

“짖는다고 소리도 못 내게 수술해버린 인간들.”

“아기도 못 갖게 하는 인간들.”

“가족이라며? 딸도 버리는 인간들.”

“시도 때도 분풀이하는 인간들.”


모두 분노에 사로잡혔다.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메아리가 되었다. 머리 큰 형이 나를 툭 치며 말했다.


“너도 쌓인 게 많을 텐데. 한마디 해.”

“난 모르겠어요….”

“그럼 따라 해. 나를 버린!”

“나를….”

“나를 버린!”

“정말 나를 버린 걸까요? 왜 버렸을까요?”

“우리는 더 화낼 필요가 있어. 왜 우리가 인간 때문에 상처를 입어야 해. 절대 잊지 않아. 모두 부숴버릴 거야. 얘들아, 가자!”


화가 난 그들은 불이 켜진 마을로 돌진했다. 아마 저녁거리를 찾는 것 같다. 말속에는 증오와 분노가 가득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왜 슬퍼 보일까? 섭섭함과 두려움과 불안과 상처와 실망과 걱정이 화라는 털을 뒤집어쓴 느낌이다. 내가 눈물을 글썽이자 다른 친구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머리 큰 형의 눈이 금방 지는 노을처럼 흐려졌다. 나는 기우뚱거리며 그에게 갔다. 그리고 부드럽게 얼굴을 핥아주었다.


“저는 갈게요. 형, 힘내요…….”


머리 큰 형은 말없이 나를 보다가 눈을 번뜩이며 마을을 향해 달렸다.     







나는 내 길을 떠났다. 산속은 제법 춥지만 걷는 동안에는 땀이 났다. 달빛마저 가려져 유난히 오늘 밤은 어둠침침했다. 캄캄한 밤은 산속에 사는지도 모른다. 여기부터 어둡고 가장 오랫동안 어둡다. 그래도 시간마저 삼킬 길은 없다. 늘 그랬듯이 하늘은 다시 밝아졌다. 길게 자란 풀 사이로 작은 집 하나가 보였다. 모든 게 허름해서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주인이 생각났다. 낑 소리를 짧게 내고는 마당에 엎드렸다. 가시나무에 긁힌 곳이 쓰라렸다.


“누가 함부로 내 집에 들어온 거야?”


외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여우였다. 동물 병원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내게 다가올 때마다 붉은 털이 한 올 한 올 바람결대로 나부꼈다. 겁이 나서 뒷걸음질을 치는데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려. 우리는 오는 손님에게 귀한 대접을 하는 게 전통이지.”

“…”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여우는 약간 짜증 나는 투로 말했다.

“잡아먹지 않으니까 안심해. 구미호 387대손 강기강의 이름을 걸지.”

“응….”


두려움은 곧 배고픔으로 이어졌다.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난다. 여우는 웃더니 음식을 가져왔다. 허기진 나는 음식을 줄 때마다 그릇을 금세 비웠다. 여우는 눈을 얇게 뜨며 나를 계속 지켜보았다. 괜히 신경 쓰인다. 먹을 때 건드는 게 제일 싫은데. 식사를 마치자 여우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봐 꼬맹이, 너 다리가 불편하구나? 나를 도와주면 건강한 다리로 바꿔줄 수도 있고.”

“정말?”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내가 여우 구슬을 키우고 있거든. 다리 정도는 쉽게 낫게 해 줄 수 있지.”

“진짜? 그럼 시키는 대로 할게. 정말 불편하고 힘들었거든…….”


구박하고 눈치 주던 치킨과 밀크가 떠올랐다.


“반드시 주고받는 건 구미호의 전통이야. 그러니까 내 부탁을 먼저 들어줘야 해.”

“부탁?”

“이 길로 조금 내려가면 작은 마을이 있어.”


여우는 주머니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이 가루를 파는 집에 가서 여자 사람에게 손수건을 줄래?”


주머니 안에는 시커먼 가루가 가득 들어있었다. 달콤하면서도 신 향기가 났다. 주인도 자주 먹던 가루다. 나는 부푼 마음으로 일어났다. 손수건을 물자 비릿한 피 냄새가 깊게 풍겼다. 작은 길 끝에는 꽃들이 움직이며 진한 향과 옅은 향을 번갈아 뿜었다. 언덕 아랫마을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들의 눈을 피해 조심히 내려가다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문득 돌을 던지던 아이가 떠올랐다. 나는 후다닥 가루 냄새가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루를 만지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머리털이 없는 사람은 무릎을 꿇더니 손수건을 보았다.


“이건 내 손수건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손수건을 펴본 사람은 깜짝 놀라 나를 안고 뛰었다. 큰일이 난 것처럼 손을 떨었다. 급한데도 나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고마웠다. 분명 여우네 집으로 가는 거다. 대체 여우는 무슨 생각인 걸까? 그녀는 울면서 언덕을 올랐다. 집에 도착하자 방문을 급하게 열며 여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부엌에서 웬 사람을 부축해서 방으로 옮겼다. 머리에 피가 잔뜩 묻은 사람이었다. 그의 몸에서 여우 냄새가 심하게 났다. 머리털이 없는 사람은 알뜰살뜰하게 다친 사람을 간호한 뒤에 저녁이 되자 요리까지 하고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나는 방에 누워 여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누워있던 사람이 크게 웃으며 방바닥을 마구 쳤다. 깜짝이야!


“하하하, 드디어 우리가 이루어지겠구나!”


사람은 점점 모습이 바뀌더니 여우로 변했다. 나는 놀라서 연신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사람이 여우로 변할 수 있지? 아니면 여우가 사람이 된 건가? 여우는 지난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사람과 진정한 사랑을 나누어야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픈 척을 해야 하나 보다. 그러면 걱정해주고 보살펴주고 밥도 주고 그런가 보다. 문득 다리가 불편해진 뒤로 나를 소홀히 했던 주인이 떠올랐다. 우리에게는 사랑이란 게 부족한 걸까? 괜찮아. 다리를 고치고 가면 주인이 좋아할 거야.


“이제 다리를 고쳐줘.”

“그건 올해 그녀와 결혼한 뒤에 해줄게. 여우 구슬의 힘을 조금 더 모아야 해.”


내가 기운이 빠져 시무룩해 있자 여우가 구슬을 꺼내며 말했다.


“대신 지금 네 주인이 뭐 하는지 보여줄게. 잘 봐.”


구슬은 점점 밝아지더니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반가워서 굳었던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어두운 얼굴을 한 주인은 짐을 싸고 있었다.


“어? 주인이 이사 준비를 하네. 달력을 봐. 이사 날짜가 내일이라고 적혀있어.”

“이사가 뭐야?”

“다른 곳으로 집을 옮기는 거지.”

“집을 옮긴다고?”


나는 마음이 조급해져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어디가? 기다렸다가 다리를 고쳐야지!”

“미안, 더 급한 일이 있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빠르게 걸었다.







기다리고 있던 밤은 오늘도 낯설게 나를 맞아주었다. 긴 시간을 벗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주인을 만나면 뭐라고 말하지? 나를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또 버리면 어떻게 하지? 불안은 밤의 악취를 타고 왔다. 더 빨리 지치는 것은 몸보다 마음이다. 어둠이 나를 토해낼 때쯤이 되자 산 끝자락에 다다랐다. 철썩철썩 물이 때리는 소리에 정신이 맑아졌다. 눈앞에 펼쳐진 물은 꼬리에 꼬리를 문 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물이 내는 우렁찬 소리 틈에 작고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 세우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 같은 건 흙탕물에서 살아야지. 암.”


큰 웅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동그란 거품이 터지면서 작은 소리가 울렸다.


“괜히 태어나서 이게 무슨 고생이냐. 누구는 넓은 바다에서 사는데 나만 이게 무슨 꼴이람.”


물고기는 힘없이 꼬리지느러미를 움직였다. 많이 지쳐 보였다.


“얘, 무슨 일이야?”

“일은 무슨. 일이야 맨날 있지. 좁고 답답한 이곳에서 평생 사는 게 일이지. 바로 바다가 코앞에 있는데 불행한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사네….”


물고기는 계속 침울한 목소리를 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좁은 곳에서 벗어나 철썩철썩 물이 움직이는 넓은 곳으로 가고 싶은 듯했다.


“내가 저쪽으로 옮겨줄까?”

“오! 정말? 그런 수가 있구나. 그래그래. 도와줘.”


물고기의 입은 바쁘게 움직이고 눈은 반짝였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물 위로 폴짝 뛰었다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살살 물고기를 물고 조심히 옮겼다. 풍덩 소리와 함께 물고기는 깊은 물속으로 날쌔게 헤엄쳤다. 금세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기분 좋게 돌아서는데 물고기가 외쳤다.


“고마워. 친구. 용왕님도 고맙다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집으로 가면 주인이 없다니까 반드시 물고기가 가리키는 길로 가래. 그래야 주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나?”

“그래? 정말 고마워.”


바삐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여기 너무 넓어. 무섭고 불안해. 몸이 따끔하기도 하고. 혹시 병인가? 여기는 나보다 크고 예쁜 물고기가 많네. 어떤 물고기는 나를 자꾸 째려보는 건지 노려보는 건지 기분 나빠. 혹시 잡아먹겠다는 건가? 전에 있던 곳에는 아는 친구도 있었는데 여기는 아무도 없고….”


나는 물고기의 말을 다 듣다가는 주인을 못 만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원래대로 옮겨줘?”

“그래그래! 진짜 마지막이야. 진짜!”


뭍으로 나온 물고기를 조심히 옮겨주었다. 웅덩이에 내려놓자 풍덩 소리와 함께 물고기는 신나서 이리저리 헤엄쳤다. 이제 물고기가 말한 방향대로 움직이면 된다. 물고기를 찾는 건 쉬웠다. 길쭉하게 세워진 막대마다 물고기 모양이다. 머리가 가리키는 대로 힘차게 발을 옮겼다. 뒤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여긴 좁아. 다른 애들이랑 너무 가까이 있어서 답답하고 우울해. 물도 탁하고 어두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떠났다. 어디를 가도 저 친구가 만족하는 답은 없다. 길게 세워진 막대를 따라갔다. 주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났다. 물고기 막대기 끝에 다다르자 이번에는 집에 달린 물고기가 길을 알려주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나는 모르는 척 갈 길을 갔다. 이번에는 차에 그려진 물고기가 가리키는 커다란 건물로 향했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까? 건물 주변을 헤매다 바닥에 물고기가 그려진 작은 숲길을 찾았다. 잎이 바람결대로 떨어지는 길이었다.

그곳에 주인이 있었다. 꽃잎처럼 작았지만 한눈에 주인인 걸 알았다. 주인은 긴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어린 날 코가 닳도록 세상을 누볐을 때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주인은 나를 알아볼까? 나는 반가워서 한걸음에 달려갔다. 처음 동물병원에서 만났을 때 났던 풀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주인은 내 목소리를 듣더니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여기예요.”


나를 발견하고 주인은 풀썩 주저앉았다. 긴 머리털이 얼굴을 모두 가렸다. 나는 품에 깊숙이 안겼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이 따뜻했다. 나를 안은 주인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


나도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나를 받아준 주인이 그저 고마웠다. 이제 우리는 다시 시작이다.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보리님, 저녁 바람이 정말 쌀쌀해요. 이제 들어오셔야 할 것 같아요.”

“네!”


나는 조금 밝은 목소리로 말한 뒤에 목발을 힘차게 짚으며 병원으로 향했다. 입원 후 처음으로 대답한 내가 반가웠는지 간호사는 환히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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