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평등해서 나이가 어린아이에게도 찾아온다.
나도 여섯 살 때 그랬겠지만 깜냥이는 바뀌는 것을 두려워한다. 집에 있으면 나가기 싫어하고 나가면 집에 들어오기 싫어한다. 처음 어린이집을 갔을 때, 유치원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로 격렬히 거부했다. 하지만 막상 그곳을 이해하고 나면 즐겁게 지냈다. 다음 도전은 학원이었다. 학원 이야기를 꺼내면 깜냥이는 단호하게 안 다닐 거라고 해서 주저했다가 축구교실에 1일 체험을 보냈다. -부모 욕심이지만 아이가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한다.- 그런데 투정도 없이 너무 잘하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한 번 준 간식에 반한 것이다. 그렇다. 아이는 먹으러 학원에 다녔다. 아쉽게도 경기에 무단 침입한 관중처럼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석 달 만에 그만뒀지만,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대한민국 축구의 미래는 훗날 생길 손흥민 선수의 자녀에게 맡기려 한다.-
그리고 두 번째 학원을 물색했다. 유치원에서 친한 친구가 다니는 태권도 도장으로 정했다. 담임 선생님께 친구가 다니는 학원 이름을 여쭤보고 바로 1일 체험을 신청했다. 도장은 학부모의 평도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전화로 알려준 곳과 문자로 알려준 곳이 달랐다. 불안했다. 도장을 가니 역시나 친구가 다니는 학원이 아니었다. 아내님과 고민하다가 그냥 평이 좋은 곳으로 보내기로 했다. 가기 전까지 손사래를 치던 아이도 다행히 거부감 없이 잘 다녔다. 그렇다. 여기도 간식의 역할이 컸다. 모든 게 익숙한 대로 흘러가면 그건 삶이 아니다. 지지고 볶고 삶아야 삶이다. 오늘은 태권도장에서 집으로 향하는데 아이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시소하고 싶어.”
“시소? 여기 놀이터에는 시소가 없는데?”
아이는 입을 굳게 닫았다가 몇 초 뒤에 다시 어렵게 입이 열렸다.
“시소하고 싶어.”
시소? 대체 시소가 뭘까? 열매를 ‘음매’라고 해서 내가 한참 오해했던 4살 깜냥이가 겹쳐 보였다.
“태권도 시소하고 싶어.”
“아! 취소하고 싶다고?”
말을 이해했다는 기쁨과 동시에 당황스러웠다.
아이에게 첫 번째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문제는 또래 아이였다. 자기가 큰 공을 가지고 놀면 와서 뺏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매일 그런다고 표현한 걸 보니 요 며칠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오늘은 그 아이를 피해 도망치다가 넘어지기까지 했다며 눈물을 보였다. 새로운 사회에서 부딪히는 첫 장면을 목격한 기분이다. 그만둘 수도 있지만 그러면 비슷한 어려움을 찾아올 때마다 쉽게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집단을 가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는 건 디폴트 값 default value 아니던가! 아이의 마음에 공감해주고 해결 방법을 몇 가지 알려주었다. 고르라고 하니 아이의 얼굴이 좋지 않다. 뭐가 문제였을까? 공감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길고 짧은 것은 내가 아닌 상대의 기준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 정도 했으면 다음으로 넘어가도 되겠지? 이쯤 하면 됐잖아?’의 자세를 내가 강요하면 안 된다. 그건 상처 받은 타인이 자신에게 쓰는 말이다. 좀 더 긴 호흡으로 공감 시간에 몰두하기로 다짐해본다. 그 뒤로 두 명의 또래 아이가 태권도 띠로 깜냥이 목을 조르는 놀이를 했다. 아이들이라 힘이 약해서 큰일은 아니지만, 큰일이 될 사건이어서 관장님에게 잘 전했고 잘 해결되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잘 지내고 있다. 이제 깜냥이는 사건이 생기면 관장님에게 쪼르르 달려간다. 다른 아이의 마스크가 끊어진 것까지 알릴 정도로 용기가 생겼다. 그거면 됐다. 언제 두 번째 시련이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옆에서 열심히 지지할 준비운동 중이다. 하나! 둘! 하나!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