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자녀를 둔 엄마들과 오랜만에 모인다고 말했다. 아이끼리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한 아내의 노력에 감동이 잔잔히 밀려왔다. 뒤이어 혼자만의 시간이 모처럼 생긴다는 기쁨이 성난 파도처럼 마음을 덮쳤다. 소리 없는 환호성은 내 귀에만 들렸다. 포커페이스를 계속 외쳤지만, 아내의 눈이 올라가는 걸 보니 표정 관리는 실패했다. 나는 아내의 아름다운 목적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칭찬 전략을 전개했다. 아내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자꾸 의미심장하게 웃는 게 불안했다. 부풀대로 부푼 불안을 움켜쥔 아내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니까 여보, 아이들하고 놀이터에서 한 시간만 놀아 줘.”
“응?”
“예전부터 아이들끼리 어울리는 모임을 만들고 싶어 했잖아. 지금 해보는 거 어때?”
그녀는 설득의 고수다. 내가 예전에 했던 의견까지 말에 버무려서 빠져나갈 출구를 막았다. 나는 잠시 입을 잃었다. 하지만 포기하기는 이르다. 못 먹어도 고다.
“그래? 난 너무나 좋지. 그렇지만 요새 한파라 밖에서 노는 게 괜찮을까? 아이들이 추울까 봐 걱정인데?”
짐짓 심각한 척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네 수법은 이미 다 간파했다는 듯이 아내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하는 걸로 알게. 고마워. 애들이 참 좋아할 거야.”
어버버 하다가 1시간 놀이 강사가 되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7~8개의 놀이를 가볍게 준비했다. 그게 얼마나 겸손하지 못한 행동이었는지 뒤늦게 알았다.
드디어 만남의 날이 되었다. 이미 엄마들에게는 1일 트니트니-체육 놀이하는-선생님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다른 동네 놀이터에 도착하자 아내가 아이들을 줄줄이 데리고 나왔다. 날씨는 흐렸지만 춥지 않았다. 6명의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5살 유치원생까지 다양했다. 간단히 인사하고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놀게 했다. 주변과 나에게 익숙해진 아이들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삼촌이랑 탈출 놀이할 사람~”
“저요! 저요!”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5살 막내 수진이도 호기심이 생기는지 슬금슬금 내게 왔다. 낯가림이 너무나 심해서 곧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엄마들이 예상한 아이였다. 두 번 놀고 나더니 제일 나이 많은 1학년 연희가 다른 놀이를 하자고 한다. 한 개 놀이를 그래도 여러 번 할 줄 알았는데 10분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즐거워했지만, 놀이가 한두 번 끝나면 또 다른 놀이를 하자고 졸랐다. 준비한 놀이 보따리는 금세 바닥났다. 시계를 보니 이제 4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나는 더 할 놀이는 없다고 백기를 들었다. 그러자 내게 모였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5분쯤 지났을까. 아이들은 새로운 놀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얼음 속에 숨겨진 비비탄을 찾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땔감처럼 모으기도 했다. 수줍음이 많은 수진이는 솔잎을 가져와서 내게 간지럼을 태우기도 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놀이를 교사처럼 가르치려고 했다니! 진짜 놀이가 뭔지 알면서 그걸 실천하지 못했다. 나는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친구처럼 아이들을 따라다녔다. 그러자 그 안에서 새로운 놀이를 생겼고 함께 놀게 되었다. 아이들은 내 장갑을 뺏고 도망치기도 하고 팔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스스럼없이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나도 어른의 탈을 벗은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참이 지나자 들어와서 밥 먹으라고 엄마가 외칠 것만 같았다. 대신 아내가 다시 나타났다. 아내는 엄마들이 30분도 버티기 힘들 거라고 예상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아서 놀랐다는 말을 전하며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커피 한 모금에 나는 다시 어른이 되었다.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는 다시 어른의 길을 걸었다. 문득 처음 발령난 학교에서 점심시간마다 학생들과 놀았던 기억이 났다. 그때 재미있게 놀던 민철이가 내게 말실수를 했었다.
“형! 뒤에! 뒤에!”
나보고 형이라니. 말해놓고 당황하던 민철이에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아! 생각났다.
“어, 고마워!”
나는 놀이에 빠져 해맑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