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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Jan 25. 2022

겨울에 땀이 났습니다.




여행 마지막 날은 어머니가 계신 묘원으로 향했다. 때마침 어머니 생신이어서 삼 형제와 아버지만 보기로 했다. 문제는 눈이었다. 그래도 빙판길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좋아한다. 그래야 안정감이 생긴다. 하지만 나는 그날 반대의 환경을 경험했다. 눈이 멈추고, 고속도로 상태도 좋아서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도로에 있던 더러운 눈이 자꾸 앞유리에 덕지덕지 붙었다. 앞차에서 튄 것이다. 당연히 워셔액을 뿌리며 와이퍼를 작동시켰는데 웽 소리만 날뿐 워셔액은 나오지 않았다. 평소에 워셔액을 챙기지 않았던 게 실수였다.






하는 수없이 그나마 잘 보이는 곳으로 고개를 옮겨가며 운전을 계속했다. 마치 나 혼자 안갯속에서 운전하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서행할 때 마시려고 준비한 생수를 앞유리에 뿌렸다. 눈안개(?)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깨끗하게 닦인 세상을 보니 속이 다 후련했다. 하지만 정체 구간을 지나자 임기응변이 통하지 않았다. 빠르지 않게 달리는 차-느리다고 여겼던 속도였다-에서 생각 없이 생수를 뿌렸는데 물이 하늘로 날아가고 내 소매만 젖었다. 카메라도 없는데 혼자 시트콤을 찍고 있었다. 그 순간 세상이 온통 하얗게 바뀌더니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재빨리 비상등을 켜고 조심조심 차선을 변경했다. 그나마 사이드미러는 깨끗해서 놀란 가슴을 조금 진정됐다. 쿵쿵 뛰는 심장을 달래며 갓길에 섰다. 트렁크에 조금 남은 워셔액이 떠올라서 찾았지만, 옛날 옛적의 기억일 뿐이었다. 남은 건 생수 반 통. 아직 16km는 더 가야 IC로 빠져나갈 수 있다.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유리에 생수를 조금씩 부었다. 비장한 각오로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다행히 차량이 많지 않아서 앞의 차와 거리를 길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한 차례 더 갓길에 서야 했다. 앞유리를 닦고 운전대에 앉았는데 이번에는 엔진 경고등이 켜졌다. 안 좋은 일은 몰아오기 때문에 쌓이기 마련인가 보다. 이건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고속도로 탈출(?)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젠 7km가 남았다. 모든 감각이 오로지 운전대와 앞유리에 향했다. 테트리스의 빈칸을 찾는 심정으로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목을 늘렸다.






 간절한 마음이 닿았는지 터널을 지나자 눈이 펑펑 내렸다. 눈은 금세 유리창에 붙고 물이 되었다. 운전할 때마다 싫었던 눈이 고마운 존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눈을 워셔액 삼아 긴 고속도로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은 녹기 전에 한 번 더 쌓였다. 이번에는 굽이굽이 이어지는 포천 고개가 문제였다. 아직 제설작업이 되지 않은 고개는 처음이었다. 천천히 움직여도 차가 제멋대로 가장자리 쪽으로 미끄러졌다. 깊은 배수로가 있는 곳이라 식은땀이 났다. 속도를 더 줄이고 운전대를 완전히 꺾었다. 그래도 차는 한참을 밀렸다가 간신히 원위치로 돌아왔다. 다행히 뒤에는 차가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헛바퀴가 돌며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제법 높은 고개인데 넘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자동차 미끄럼 방지 경고등은 꺼질 틈 없었다. 고개 중반쯤 왔을 때 뒤에 작은 트럭 한 대가 뒤따라왔다. 내 비상등을 보고 거리를 유지했으면 했는데 바짝 내게 다가왔다. 내 차가 눈에 밀리면 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이라서 안전거리를 유지하지 않는 뒤차가 야속했다. 꾸역꾸역 정상에 도착했고 뒤차는 그제야 앞질러서 갔다. 이번에는 내가 뒤차가 되었다. 3km 속도로 슬금슬금 내려가는 트럭을 따라갔다. 아까는 미워 보였지만 이제는 같이 눈을 이겨내는 동료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물 같다. 워셔액 같은 눈이 와서 고맙다가도 고개에 내린 눈은 그토록 싫었고 묘원에 도착해서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걸을 때는 성스러운 기운마저 느껴졌다. 눈은 그냥 내린 것뿐인데 그것을 싫어하고 기뻐하고 놀라고 감격하는 건 나였다. 쌓일 듯이 퍼붓는 어려움도 눈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눈밭에 내가 바뀔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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