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then, i found you
2018년 7월 24일 20:33 패션 아일랜드 -> 얼바인 집 $9.79
캘리포니아 뉴포트 비치 근방에 있는 패션 아일랜드는 쇼핑몰 중에서도 고급스러운 곳이다. 기분 좀 내보고자 친구와 함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노천에 앉아 아름다운 노을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더니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집으로 가기 위해 리프트를 호출했고, 드라이버 Toan을 만났다. 한눈에 봐도 앳된 모습이 영락없는 대학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중2들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미국에선 대학생들이 바로 그런 존재이다. 두려울 게 없는 무법지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토안 역시 거칠게 운전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가 대학생일 거라는 나의 추측을 더 강한 확신을 갖게 했다. 서둘러 안전벨트를 매고 긴장의 끈을 놓지않고 있는데 문득 음악이 귓가를 깊게 파고들었다. 순간 긴장감이 사라지고 다시 한번 황홀경이 펼쳐졌다.
"이 음악 뭐야? 나 너의 플레이리스트가 엄청 맘에 들어."
때아닌 나의 고백에 토안은 잔뜩 밝아졌다. 더불어 그의 드라이빙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 후로 우리는 토안의 스마트폰에 담긴 플레이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버나 리프트 드라이버와 나누는 이야기 중 가장 즐거운 건 그들의 플레이리스트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고향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보물 같은 인디 음악들을 찾아 들려주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나의 음악 취향을 묻고 그 음악들을 찾아주기도 했다.
"이 음악, 제목 좀 찍어줄래?"
토안은 매우 기뻐하며 그 앨범의 타이틀을 내 핸드폰에 담아 주었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했다.
"네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좋아해 줘서 기뻐."
토안을 만나 또 하나의 음악과 아티스트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제목은,
2018년 7월 29일 9:40 얼바인 어딘가 -> 헌팅턴 비치 $18.19
캘리포니아에 사는 남녀 통틀어 모든 이가 '남자 구경하는 날'이라고 소개하는 US open surfing이 열리는 날이었다. 전 세계 모든 서퍼들이 서핑 대회를 위해 헌팅턴 비치로 모인다. 학교에서는 행사장까지 일정 금액의 버스비를 받고 버스를 운행했다. 버스를 타는 곳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아침 일찍 나와 운동 삼아 그곳까지 걷는데 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절망적인 게 있었으니 한참을 걸어 도착한 장소가 전혀 다른 곳이었다는 것. 구글맵에 목적지 이름을 잘못 설정해 벌어진 대참사였다. 스쿨버스 시간도 놓쳐버렸고, 매우 우울한 기분으로 부랴부랴 리프트를 불렀다. 그리고 Daniel을 만났다.
생각보다 먼 거리를 가게 된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웬일인지,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대화가 굉장히 잘 통했다. 미국 시골 어딘가에서 이곳 캘리포니아로 온 다니엘은 개발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삶에 꽤나 만족을 하고 있는 그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고향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에 대해 칭찬을 이어갔다. 한국인 친구가 있어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크다며 꼭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하던 그가 US surfing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흘려주었다. 그러다 문득, "선크림 바르고 왔어? 선크림을 꼭 발라야 해."라고 말했다. 내 친구 다니엘도 나만 보면 선크림을 꼭 바르고 다니라면서 그 이유가 '너는 하얘서'란다. 백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무척 당황스러운 느낌이다. 하지만 리프트 드라이버 다니엘을 만났던 이 시점, 나의 피부는 이미 로컬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을려져 있었다. 그런데 선크림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민망해졌다.
"캘리포니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나 엄청 하얬어."라고 하자 다니엘이 말한다.
지금은 캘리걸 같아.
우왓. 캘리포니아 사람에게 듣는 캘리걸이라는 단어는 뭐랄까. 굉장한 칭찬처럼 들림과 동시에 내가 이곳에 조금이나마 속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내가 캘리걸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 상상이나 해봤나.
아무래도 이 즈음인 것 같다. 학교 친구들조차도 너 언제 이렇게 까매졌냐며 나를 보고 놀라던 시점이.
2018년 9월 8일 LA 한인타운 -> LA 유니온 스테이션 $8.09 (shared)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어 LA 고모에게 인사를 드리러 혼자 LA에 다녀왔다. 차 없는 뚜벅이는 LA까지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데, 조금 비싼 암트랙 말고 이곳 사람들이 통근열차로 이용하는 메트로링크를 주로 이용했다.
메트로링크는 아침, 저녁 통근 시간에만 운행하지만 굉장히 저렴하고, 심지어 학생 할인을 받으면 8달러 정도로 LA까지 갈 수가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주로 차로 이동을 하기 때문에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이런 열차는 가난한 사람들이 타고 더럽고 위험한 운송수단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많이들 이용하고, 실제 탑승해본 결과 깨끗하고 위험한 사람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생각보다 백인들도 많았고, 가족 단위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하지만 유니온 스테이션에는 위험한 사람들도 꽤 있긴 하다.) 미국에 있는 동안 생각보다 미국 사람들의 경험의 폭이 넓지 않았고, 한 번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끝까지 경험하지 못할 것 같은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면들도 많이 보였다.
얼바인으로 돌아오기 위한 메트로링크를 타기 위해 리프트를 타고 LA 유니온 스테이션으로 가고 있었다. 역 근처에 다다랐을 때 드라이버 Louis가 물었다. "암트랙을 타니, 메트로링크를 타니?" 두 열차가 다 같은 장소에서 출발하는데 입구가 다른 것도 아니고 이걸 왜 묻는 걸까 의아했다. 메트로링크를 탈 거라는 대답에 루이스가 엄청 놀라며 묻는다. "메트로링크를 타봤어? 탈만 해? 위험하지는 않고?"
20대 후반-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그가 메트로링크를 단 한 번도 타본 적 없다는 말은 나에겐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나는 그에게 열심히 메트로링크 소개를 이어갔다. 마치 메트로링크의 홍보대사라도 된 것처럼.
차가 없으면 여행하기도 힘들다는 캘리포니아지만, 내가 경험한 캘리포니아는 그렇지 않았다. 생각보다 기차 노선이 꽤나 잘 마련되어 있고 시간도 잘 지키는 편이라(물론, 유럽에 비해) 캘리포니아 곳곳으로 여행하는데 엄청나게 유용했고, 특히나 해변을 달리는 낭만적인 코스도 있어 꼭 한 번 즈음 이용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차밖에 모르는 캘리포니아 사람들에게 기차 여행을 전파하기라도 해야 하는 걸까.
2018년 9월 17일 14:30 얼바인 집 -> LAX
캘리포니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며칠을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며 하도 울었더니 정작 당일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친한 친구들이 꽃을 사들고 집 앞으로 찾아와 배웅을 해주었다. 친구 중 누군가에게 공항까지 라이드를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이곳에 살면서 이곳 사람들이 LA 공항까지 가는 트래픽 가득한 그 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나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의 배웅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 줄 드라이버가 도착했다.
Suttle2LAX라는 회사는 캘리포니아 OC지역에서 그 근처 공항들로 셔틀을 운영하는 곳이다. 말이 셔틀이지 우버나 리프트와 동일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어 '셰어' 모델을 선택하면 우버의 1/3 가격으로 공항까지 갈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나의 마지막 드라이브를 책임진 드라이버는 Bernadine이었다. 허리를 넘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머리의 상단 부분만 백발이고 그 아래로는 까맸다. 백발과 흑발의 경계가 마치 자로 잰 듯 직선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 자신의 머리를 자랑스러워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염색한 건가요?" "아니, 난 염색을 하며 암을 유발하고 싶지 않아요." 순간, 염색약이 발린 내 머리가 당황스러웠다. 버나딘은 그간 내가 만난 드라이버 중 가장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 대화 소재가 어쩜 그렇게 많은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이 셔틀 회사를 운영하는 인도 출신 CEO부터 시작해, 오늘 어떤 드라이버가 팁으로 거의 100달러를 받았다는 부러움 가득한 이야기를 거쳐, 얼마 전 누군가가 우버를 운행하다 승객이 뒷좌석에서 급사했다는 사건도, 여성 드라이버로서 어떤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지, 하지만 당신은 다양한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게 좋아 이 일을 하며 사는 노년이 얼마나 행복한지, 지금 살고 있는 곳 스프링필드에 얼마나 맛있는 아시안 레스토랑들이 많은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끊임없이 수다를 이어갔다. 급기야 이런 질문까지 던졌다,
"MBTI 검사를 해본 적이 있나요? 검사 결과를 기억하고 있나요? 엄청나게 중요한 거예요. 모든 사람이 이 검사를 하고 자신의 결과를 외우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번엔 MBTI 검사로 증면된 자신의 성격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는.. 검사 결과가 기억나지 않아요. 단 하나 기억나는 건, 내가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거죠." MBTI 검사를 해본 적은 있으나 결과에 대해 그것 말고 기억이 나지 않는 나는 내 성격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그 대답만 해줄 수 있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 MBTI 검사를 받게 되었고, 유일하게 자신했던 '내향성'의 내 성향이 미국을 다녀온 후로 완전히 뒤 바뀌어 '외향적'인 사람이 되어있더라는 거.
내가 만난 캘리포니아 사람 중 최고 외향성을 가진 그녀 버나딘이 떠올랐다. 캘리포니아의 마지막 순간, 강렬했던 그녀와의 만남이.
그리고 네 달간 내가 만났던 그 많은 드라이버들과의 대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