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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도시' 라이프치히는 독서중

독일에서 가장 번성했던 출판 도시, 라이프치히의 이야기

"으으 이 먼지!"


종이 박스에 낡은 책이 한가득 쌓여있다. 색이 누렇게 바래 오래되어 보이지만 시리즈로 나와 나름 주제도 있고 표지도 다양하다. '인민과 세계 (Volks und Welt)',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사라진 동독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다. 책으로 가득 찬 박스를 나르며 졸업을 앞둔 마지막 수업으로 책 전시회를 준비했다. 


이 수업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도서학 수업인데, 매년 봄 시내 상점의 빈 창문을 책으로 꾸미는 일이다. 시내에 괜찮은 쇼윈도가 있는 상점에 일일이 찾아가 허락을 맡고 서툰 솜씨로 낡은 책들을 이리저리 놓아 본다. 이젠 존재하지도 않는 출판사의 책들을 대학 아카이브는 빠짐없이 가지고 있었다. 그 책들은 이 수업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라이프치히는 이렇게 매년 봄 도시 곳곳에 동독의 책들을 전시한다. 이 맘 때 열리는 '라이프치히 국제 도서박람회'에 맞춘 커리큘럼이다.


라이프치히, 최대의 출판도시였다는 '역사'


독일 어느 도시에 살까 고민했을 때 라이프치히에 유난히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독일 국립도서관이 바로 여기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만만치 않은 사용료를 내야 해서 아직 열람실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았지만, 그 당시엔 아주 매력적인 요소였다. 


수도 베를린도 아니고 이런 곳(?)에 왜 국립 도서관이 있는걸까. 알고 보니 라이프치히와 프랑크푸르트에 각각 하나씩 국립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독일에서 가장 큰 도서박람회가 열리는 도시도 이 두 곳이다. 동서로 떨어진 이 두 도시가 책으로 연결된 이유를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독일 분단의 결과구나'


하지만 책과 출판의 도시가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라이프치히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사실까지 눈치채기는 쉽지 않다. 독일 라이프치히는 한 때 출판 산업으로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1825년 4월 독일 출판인 협회가 여기서 생겨났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직업 분야 전문 단체다. 이들은 도서 정가제와 저작권 등에 대한 협약으로 출판 산업의 기틀을 탄탄히 다졌다. 1912년엔 국립도서관의 전신인 '도이체 뷔혀라이 (Deutsche Bücherei)'가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독일 출판사 인젤(Insel)과 레클람(Reklam)을 포함해 500개가 넘는 주요 출판사, 출판 및 편집 실습 장소, 국제적 규모의 도서 박람회가 다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이 곳, 라이프치히였다. 


라이프치히가 이렇게 출판 산업으로 번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라이프치히는 독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 있는 곳으로 그 학술적인 분위기를 이어받아 독일 최초의 학술지 ‘악타 에루디토룸 (Acta Eruditorum)’가 출간된 도시다. 라이프치히 신문 ‘아인콤멘데 차이퉁 (Einkommende Zeitung)’은 세계 최초의 일간 신문으로 꼽힌다. 이런 배경에서 출판 산업의 발전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수많은 출판사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출판 유통 시스템도 함께 발전했다. 그 당시 독일에서 유통되는 책 대부분이 라이프치히로 주문되었고 이곳 물류회사를 통해 독일 전역으로 배송되었다고 한다. 


ㅣ1910년대 라이프치히 출판인 협회 등이 있던 출판 단지(왼쪽)와 독일 국립 도서관(오른쪽) 전경 @Kirstein ㅣ
ㅣ2017년 지금의 모습. 복원중인 라이프치히 출판 단지 일부(왼쪽)와 신식 건물이 더해진 독일 국립 도서관(오른쪽)ㅣ


전쟁과 사회주의가 무너뜨린 '책의 도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라이프치히 출판 산업 구역은 폭격의 주요 타깃이 됐다. 전쟁 당시 독일의 수많은 전쟁 선전물과 선전 도서를 이곳에서 찍어 냈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 출판 산업은 번영했기에, 더욱 빠르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전쟁은 끝났지만, 출판 산업 단지의 80퍼센트가 사라졌다. 이곳에 떨어진 폭격은 출판 도시라는 라이프치히의 역사에 떨어진 폭격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엔 동독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지식과 사상의 자유로운 교류를 원했던 출판사들은 모두 서쪽으로 빠져나갔다. 라이프치히에 남은 출판사들은 초기에는 문학 장르를 통해 기관지 언론이 해내지 못한 '비판적 여론'의 기능을 했다고 한다. 비공식 검열은 곧 공식적인 검열로 확대되었고,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사회주의 출판물을 펴냈다. 이제 동독에서는 소소한 일상과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나 여행책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서독도 이제 그들만의 출판 시장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서독은 프랑크푸르트에 출판인 협회와 국립 도서관, 도서 박람회를 새로 세웠다. 1946년 국립 도서관이 문을 열었고, 3년 뒤 거대한 규모의 국제 도서 박람회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번성했다. 사회주의 체제에 갇혀 있던 라이프치히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통일이 되었지만 이미 떠난 출판사들은 라이프치히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껏해야 본사는 서쪽에 두고 라이프치히 지점을 여는 정도였다. 그것도 이내 사라졌다. 2006년 레클람 출판사는 결국 라이프치히 사무실을 닫았다. 2010년 인젤도 베를린으로 옮겨갔다. 출판도시로서 라이프치히의 영광은 이제 끝난 것만 같다.


라이프치히 도서전, 봄마다 다시 피는 희망 



매년 봄, 라이프치히는 국제 도서박람회에서 그 영광의 시간을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라이프치히 도서전의 역사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도서전이 열렸지만 라이프치히의 규모가 압도적인 수준이어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동독 시절 때도 사라지지 않고 주요한 문화 행사로 기능했는데, 서독에서도 방문자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서독 언론인들은 라이프치히 도서전을 ‘동독 문화 정책의 바로미터’로 삼았다.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통일 이후 지금까지도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문화 행사다. 


라이프치히 도서전과 도서 축제는 독일어권 전체에서 표현의 자유, 사상의 교류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큰 토론장입니다 (마르틴 불-바그너 라이프치히 메쎄 대표)


나는 올해로 3년째 이 박람회를 찾고 있다. 처음 갔을 때는 박람회 분위기에 한참 동안 매료되어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지겨움과 재미없음이라는 형용사만 따라다녔던 '책', 이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나 다양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온갖 종류의 출판물뿐만 아니라 출판물이 지향하는 생각과 사상의 교류까지 함께 담아낸다. 방송국 신문사, 정치 교육원, 정당 재단, 노동조합, 대학교도 부스를 차린다. 작가나 지식인들이 직접 참여하는 대화의 시간이 많다. 부스 하나하나에 볼거리가 가득 차 있어 하루로는 시간이 모자라다.


l 라이프치히 국제 도서박람회 풍경 ㅣ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출판 산업 관련자들에게 좀 더 중점을 둔다. 이 때문에 세계 각지에서 참가하는 관련 업체가 더 많다. 하지만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일반 시민들에게 더 열린 박람회를 지향한다. 박람회 기간 내내 시민들의 입장이 가능한 이유다. 4일 동안 독일 전역에서 온 시민들을 만날 수 있다. 카셀에서 온 미리암씨는 서점에서 일하고 있는데 동료들과 이틀 일정으로 도서전을 찾았다고 한다.


"매년 친구들과 함께 방문하는데요, 새로운 책이 뭐가 나왔는지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기획하는 행사도 꼭 가서 보는데 작가들을 직접 볼 수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라이프치히 시민들에겐 자부심이다. 박람회장이 문을 닫는 오후 6시까지 행사장에 있다가 나온 우테 할머니는 혼자서 이곳을 찾았다.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역사가 깊은 큰 행사죠. 매번 이렇게 꽉 찬 트람을 타고 가야 하지만, 라이프치히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사람들이 많고 시끌벅적한 것도 좋지요"


박람회장 밖 시내에서도 '라이프치히는 독서중(Leipzig liest)'라는 행사가 열린다. 도시 곳곳에서 도서 강독회, 강연회, 콘서트 등의 문화 행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이맘 때면 늘 도시 전체가 시끌벅적하다.


ㅣ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ㅣ

이것이 바로 라이프치히의 지향점이다.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일반 시민들이 책을 좀 더 가까이할 수 있는 계기와 분위기를 만든다. 독서를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도서전을 한 바퀴 돌고 다양한 체험 활동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책을 집어 든다. 일반 시민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공론장을 제공해 사회 정치적 이슈를 과감히 드러내기도 한다.


전쟁이 파괴해버린 출판 도시 라이프치히는 폐쇄된 동독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할 수 있었다. 통일 이후 라이프치히는 도서전은 물론 무너진 출판 단지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이미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서전으로 탄탄한 기반을 잡았고, 허름하게 비어있던 출판 단지는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저 출판 단지가 다시 문을 열 때 즈음엔 라이프치히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할 지 기대된다.







글: 이유진 (leipzig.korea@gmail.com)

사진: 라이프치히 프로젝트 (leipzig.korea@gmail.com)

http://www.mdr.de/kultur/chronik-deutsche-buecherei-nationalbibliothek-100_page-1_zc-43c28d56.html

http://www.zeno.org/Ansichtskarten/M/Leipzig,+Sachsen/Buchh%C3%A4ndlerhaus+und+Buchgewerbeh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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