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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가의 미운 오리 새끼,
RB 라이프치히

RB 라이프치히에 대한 비난과 혐오, 그리고 항변


RB 라이프치히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때문에 라이프치히 사람들 사이에서도 축구 소식은 큰 화젯거리다. 나도 얼마 전 직장 동료와 얘기하다 축구 얘기를 꺼냈다. 동료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라, 으레 그 친구가 요즘 RB 라이프치히의 활약으로 신나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동료의 반응이 의외다. 자기는 RB 라이프치히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RB 라이프치히를 싫어하는 이유가 있어?” 


내 물음에 동료는 자신은 RB 라이프치히 팬이 아니라, 헤미 라이프치히 (Chemie Leipzig) 팬이라고 했다. ‘헤미 라이프치히? 라이프치히에 그런 팀도 있었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동료는 내가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간단히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사정은 이랬다. 


RB 라이프치히는 사실 오리지널 지역팀이 아니다. 현재 5부 리그에 속해있는 헤미 라이프치히가 라이프치히 토종팀이다. RB 라이프치히는 레드불(Redbull)이 라이프치히 인근 지역의 팀을 인수해 라이프치히 축구팀으로 만든 팀이다. RB 라이프치히 때문에 토종팀이었던 헤미 라이프치히는 찬밥 신세가 돼버렸고, 이 때문에 헤미 라이프치히의 팬들은 RB 라이프치히를 무지 싫어한다는 얘기였다. 지금도 헤미 라이프치히 팬들은 RB 라이프치히보다 헤미 라이프치히의 5부 리그 경기를 더 즐겨본다고 했다. 그간의 내막을 잘 몰랐던 나는 RB 라이프치히가 오리지널 지역 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런 속사정이 있을 줄이야. 그 뒷얘기가 좀 더 궁금해 RB 라이프치히에 관한 내용들을 찾아보았다.


세계적인 스포츠음료 회사인 레드불은 국제적인 스포츠 마케팅의 일환으로 세계 여러 지역에 축구팀을 운영하고 있다. 레드불 잘츠부르크(2005년)를 시작으로 뉴욕 레드 불스(2006년), RB 라이프치히(2009년), 그리고 최근에는 레드불 브라질 (2015년)까지 여러 대륙에 걸쳐 차례로 레드불 팀을 구축해왔다. 



오스트리아, 미국 다음으로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하고 싶었던 레드불은 애초에 라이프치히가 아닌 다른 지역 축구팀들을 접촉했다. 하지만 과반 이상의 의결권 소유와 클럽 이름, 문장, 색상의 변경을 원했던 레드불의 요구에 이들 클럽 모두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레드불은 라이프치히 지역팀들에게 인수 제안을 했지만, 이마저도 독일 축구연맹과 지역 팬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처음 계획들이 차례로 실패하고 결국 레드불은 라이프치히 근교의 작은 도시 마크란슈테트 (Markranstädt)의 축구팀 SSV 마크란슈테트의 클럽 라이선스를 사는 데 성공한다. 이후 팀 명을 RB 라이프치히로 바꾸고 5부 리그에 진출했다. 레드불은 이 과정에서 독일 축구계의 규정을 피하기 위한 편법을 사용했다. 


축구팀도 얻고 '광고'도 하기 위한 레드불의 편법


독일 축구연맹은 팀 이름에 스폰서의 명칭과 로고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RB 라이프치히는 정식 명칭을 라젠발슈포트(RasenBallsport)라고 하고 이니셜 RB를 사용중이다. 하지만 RB라는 이니셜은 누가 봐도 레드불을 떠올리게 한다. 라젠발슈포트를 우리말로 바꾸자면 '잔디공 운동'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독일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지 않는 단어다. 규정을 피하기 위해 레드불이 지어낸 작위적인 명칭이다.

I RB 라이프치히는 다른 레드불 팀들과 달리 레드불의 심볼 마크를 비슷하게 바꿔 사용하고 있다 I


한편 분데스리가는 다른 유럽 축구 리그와 달리 50+1이라는 독특한 운영 규정을 갖고 있다. 어느 한 기업이나 개인이 축구 클럽의 의결권을 50% 이상 갖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규정인데, 특정 투자자가 클럽의 운영을 좌지우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한 장치이다. 레드불은 이 규정도 편법적으로 우회하고 있는데, RB 라이프치히의 자본 지분율은 레드불이 99%, 클럽 조합 측이 1%로 재정적인 측면에서 레드불이 실질적으로 클럽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분데스리가의 50+1 규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의결권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레드불 49%, 조합 측 51%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클럽 조합 측 이사진 대부분이 레드불 직원이거나 관계자여서 사실상 레드불이 클럽의 운영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이는 일반 팬들에게도 클럽 운영에 대한 투표권을 허용하고 있는 다른 분데스리가 팀들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일례로 유럽리그 평균 관중 1위를 자랑하는 도르트문트 (Borussia Dortmund)는 현재 13만 9천 명의 유료회원 팬들에게 클럽 운영의 투표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년간 회원비가 62유로로 저렴해서 누구나 쉽게 클럽 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 이 같은 민주적인 운영 방식이 팀에 대한 팬들의 강한 소속감과 애정을 이끌어내는데 한 몫하고 있다. 하지만 RB 라이프치히는 년간 회원비가 1,000유로인 골드회원이 된다고 해도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현재 RB 라이프치히는 17명의 이사진만 의결권을 갖고 있다. 다른 분데스리가 팀들에 비해 매우 폐쇄적인 시스템이다.


RB 라이프치히가 다른 팀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또 하나 더 있다. 다른 팀들이 따라오지 못할 만큼의 막대한 투자규모다. 레드불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지난 2년 간 1,000억 원이 넘는 돈을 RB 라이프치히의 선수 영입에 쏟아부었다. 분데스리가 팀들의 평균을 훨씬 웃돈다. 거대 자본의 지배를 제한하는 분데스리가의 운영원칙 상 분데스리가 팀들은 클럽 운영에 쓸 수 있는 자본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분데스리가가 영국 프리미어리그를 비롯해 다른 유럽리그와 크게 차이나는 부분이다. 그런데 레드불은 팀 인수와 운영에 있어서 변칙적인 방법으로 분데스리가의 오랜 원칙과 전통을 깨트리고 있다. 


이런 이유로 RB 라이프치히는 이번 시즌 분데스리가 돌풍의 주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일 최고 비호감 클럽’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도 얻었다. 


폭력사태로 번진 분데스리가의 'RB 반대' 운동


다른 팀 팬들은 ‘RB 반대’ (Nein zu RB) 운동을 벌이며 RB 라이프치히와의 경기 때마다 경기를 보이콧하거나 경기 중에 야유를 퍼붓는다. 다른 팀 팬들뿐만 아니라 팀 창단 때부터 라이프치히 지역 축구팬들의 반대 운동도 거셌다. 레드불이 SSV 마크란슈테트를 인수하자 지역 축구팬들은 상업주의로 지역의 축구 전통과 문화를 훼손한다며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팀 창단 직후 축구팬들의 반대운동이 거세지자 다른 축구팀들이 잇달아 예정된 시범경기를 취소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ㅣRB 라이프치히 반대 운동 Nein zu RB, '너에게는 오직 마케팅, 우리에겐 삶의 의미다'ㅣ
ㅣ2월 4일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경기에서 나타난 RB 라이프치히 비난 현수막들 ㅣ


분데스리가 팬들의 도 넘은 비난은 결국 폭력사태로 번지고 말았다. 지난 2월 4일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경기에서 경기 시작도 전에 도르트문트 팬들이 라이프치히 팬들에게 돌과 유리병까지 내던져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기 이후에는 광분한 팬들 사이 드잡이가 벌어져 경찰 병력이 출동하기까지 했다. 이날 도르트문트는 1:0으로 라이프치히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RB 라이프치히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실질적인 폭력으로 나타나 큰 우려를 낳았다. 이 사태는 언론을 통해 전국적으로 보도되며, 다시 한번 RB 라이프치히를 둘러싼 논쟁이 독일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RB 라이프치히를 지키고 싶은 팬들의 항변


RB 라이프치히를 옹호하는 팬들의 의견도 단호하다. RB 라이프치히를 옹호하는 이들은 현재의 비난과 비판은 일종의 텃세에 불과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독일 축구팬들이 레드불이 "돈으로 축구를 사고 있다"며 상업주의를 비난하지만, 분데스리가가 과연 자본과 상업주의로부터 자유로운지 되묻는다. 


이미 레버쿠젠, 볼프스부르크 등은 라이프치히처럼 각각 바이엘과 폭스바겐이라는 대기업이 100% 소유하고 있고, 뭰헨도 아디다스, 아우디, 알리안츠가 든든한 스폰서로 뒷받침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분데스리가의 스타디움이 스포츠 마케팅의 화려한 무대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유독 RB 라이프치히만 비난하는 것은 단지 레드불이라는 외국 기업이 분데스리가에 진출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라이프치히 지역 팬들은 통일 후 지금까지 구 동독 지역 축구팀에 대해 제대로 된 투자가 없었고, 이 때문에 지역 축구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점을 지적한다. 레드불 같은 투자가 없었다면 구 동독 지역은 언제까지 4부, 5부 지역 리그를 벗어날 수 없었을 거라며 항변한다. 이들 의견에서 통일 후 구 동독 지역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소외감이 느껴진다. 


이들 모두 일리가 있는 의견이다. 서독 지역 도시들은 지역의 든든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분데스리가 팀들을 저마다 갖고 있는데, 동독 지역은 통일 후 25년이 넘게 분데스리가 팀을 가져보지 못했다. 지역 축구에 대한 충분한 투자와 지원 없이는 언제까지 하위리그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동안 동독 지역에 무관심했던 이들이 이제 와서 레드불의 투자와 RB 라이프치히의 성공을 비난만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ㅣ라이프치히 축구장의 과거와 현재 I


하지만 뭔가 아쉽고 아이러니한 것은 자본주의에 반해 사회주의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이곳 구동독 지역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으로 독일 축구계를 뒤흔드는 팀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라이프치히가 독일 축구 역사에서 갖는 특별한 위치를 생각할 때도 그런 생각이 든다. 라이프치히는 독일 축구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라이프치히는 1900년 독일 축구 연맹이 최초로 결성된 곳이고, 독일 최초의 축구 리그 우승컵을 라이프치히가 차지한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하다. 또 라이프치히는 독일에서 최초로 4만 명 이상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축구장이 건립된 곳으로, 이 경기장에서 1956년에 기록된 십만 명의 축구 관중수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이 곳 라이프치히는 독일 축구의 역사가 담겨 있는 곳이고, 그만큼 시민들의 자부심도 높다.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동독의 몰락과 함께 잃어버렸던 자부심을 이제 되찾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자부심을 되찾는 데 있어 레드불이라고 하는 외국 자본의 힘을 입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독일 최고 비호감 클럽으로 불리며 비난의 화살을 맞고 있다. 통일 후 동독 지역의 상대적 낙후성이 바람직한 방식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지역들로부터 비난받고 소외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는 앞으로 라이프치히가 계속해서 감당해야 하는 짐이 되어버렸다. 이런 점을 볼 때 동서독의 온전한 통합은 아직도 여러 면에서 넘어야 할 장애가 많은 것 같다. 


레드불은 주변의 비난과 우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RB 라이프치히의 질주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레드불의 야심과 공격적인 투자가 멈추지 않는 한 RB 라이프치히의 질주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그리고 이 질주는 분데스리가를 더욱더 흔들어 놓을 것이고, 주변의 견제와 비판의 수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 독일 축구계에 의해 레드불의 행보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지역과의 관계성이 약한 레드불의 입장에서는 라이프치히를 쉽게 포기하고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떠날지도 모른다. RB 라이프치히의 활약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이유다.




글: 오정택 (leipzig.korea@gmail.com)

사진 출처:

http://www.nein-zu-rb.de/

http://www.redbullsacademy.com/academy/overview/red-bull-global/

http://www.tagesspiegel.de/sport/nach-den-attacken-der-dortmunder-fans-es-reicht-mit-dem-hass-auf-rb-leipzig/19349956.html

http://www.mdr.de/damals/archiv/artikel983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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