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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분데스리가에 입성하다

독일 통일 이후 구동독 도시의 분데스리가 첫 진출  


지난해 5월 15일 일요일, 라이프치히 시내 광장은 빽빽이 모여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지난 8년 간 라이프치히에 살면서 시내 광장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건 처음 봤다. 인산인해를 이룬 광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보려 팔을 높이 치켜든 채 대충 감으로 셔터를 눌렀다. 대체 무슨 날이었을까?


바로 라이프치히 축구팀 RB 라이프치히의 분데스리가(Bundesliga) 1부 리그 입성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ㅣ라이프치히 축구팀의 분데스리가 1부 진출을 환영하는 도심 행사 ㅣ


RB 라이프치히는 2009년 팀 창단 이후 5부 리그인 지역 리그에 속해있다가 2014년 분데스리가 2부 리그에 진출했다. 분데스리가 2부 리그 진출 소식만으로도 한동안 라이프치히가 떠들썩했다. 그런데 그 후 두 시즌 만에 분데스리가 1부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스포츠 하면 축구밖에 모르는 것 같은 독일 사람들에게 지역팀의 분데스리가 진출은 나의 상상력이 가 닿을 수 있는 그 이상의 의미와 감격이 있는 것 같다. 


나의 유학 초기 시절만 해도 라이프치히 축구팀은 어디 입 밖에 꺼내기도 부끄러운 5부 리그였는데, 그 사이 이제 1부라니. 독일에서는 내가 사는 도시의 축구팀이 몇 부 리그에 속했는지에 따라 그 도시의 등급도 함께 매겨지는 듯한 분위기이다. 때문에 다른 서독 도시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축구 얘기라도 나오면 괜스레 나도 모르게 맘이 쪼그라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 당당히 가슴 펴고 말할 수 있겠다. 나 1부 리그 도시에 산다고. 축구를 별 좋아라 하지도 않고 게다가 외국인인 내 마음도 이런데, 여기 토박이들이야 오죽할까? 독일 사람들의 마음에도 한이란 게 있다면, 그 일요일 광장의 자리는 이 곳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 응어리진 그간의 서러움과 한을 씻어내는 자리가 아니었을까? 


 “Wir sind E1ns! (We are One!)”


1부 리그 진출을 기념해 내건 캐치프레이즈가 라이프치히 시민들의 마음을 단 한 문장으로 대변해주는 듯했다.


ㅣ 'Wir Sind Eins (우리는 1이다)', 1부리그 진출을 기념해 한 예술가가 거리 미술을 선보이고 있다ㅣ


라이프치히 축구팀의 분데스리가 1부 진출은 독일 사회에서, 특히 이곳 구 동독 지역에서는 축구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독일 통일 후 26년 만에 구 동독 지역에서 처음으로 분데스리가팀이 나왔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 후 “우리는 2등 국민인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곳 사람들은 생활 전반에서 모종의 박탈감과 자괴감을 느껴왔다. 이들이 사랑하는 축구에서도 분데스리가는 그동안 서독지역만의 잔치에 불과했다. 그러던 이들이 이제 분데스리가팀을 갖게 되었다. 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 같은 일을 맛본 한국인이라면 그게 축구 이상의 그 어떤 것이라는 걸 알 거다.


ㅣRB라이프치히의 분데스리가 1부 진출 행사에서 만난 라이프치거 쾬바흐(Könbach)씨ㅣ


이날 행사에 참석했던 쾬바흐(Könbach) 씨는 RB 라이프치히의 분데스리가 진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매우 기쁜 소식입니다. 특히 라이프치히 지역을 위해서요. 모두들 엄청 좋아하고 있어요. 이제 분데스리가 경기를 라이프치히에서도 볼 수 있게 됐어요. 예전에는 분데스리가 경기를 보기 위해서 베를린까지 가서 봐야 했어요. RB 라이프치히의 분데스리가 진출이 지역 경제와 모든 분야에서 도움이 될 거라고 봐요. 오늘 이 자리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그날 광장에서 특히 내 눈길을 끌었던 건 가족 단위로 참석한 이들의 모습이었다. 아이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3대가 다 함께 참석한 가족들도 보였고, 아빠 어깨에 무등 탄 아이들, 아예 나무를 타고 올라가 행사를 지켜보는 아이들까지 다양한 세대가 어우러져 라이프치히 팀의 선전을 축하하고 응원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1, 2차 세계대전과 분단의 과정을 고스란히 경험한 세대,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라나서 통일과 급격한 체제 변화의 진통을 경험한 세대, 그리고 그런 아픈 과거는 전혀 경험하지 않은 통일 후 세대. 이 3대가 광장에 모여 함께한 특별한 시간을 통해 지난 세기의 광폭한 역사가 남기고 간 깊은 상처가 조금은 더 아무는 듯했다. 시끌벅적한 사람들 속에 손자 손녀들과 꼭 붙어 있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이마에 깊이 파인 지난 세월의 상흔이 그의 손자 손녀들에게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이제 분데스리가에 당당히 입성한 축구팀처럼 이 아이들은 밝고 찬란한 앞날을 맞이하길 맘 속으로 염원했을 것 같다.



라이프치히, 분데스리가의 돌풍을 일으키다


RB 라이프치히는 분데스리가 1부 진출 첫 시즌부터 전통 강호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라이프치히의 승전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환호를 보내면서도 예상 밖의 선전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분데스리가 입성만으로도 온 도시가 축제의 분위기였는데, 개막 이후 13경기 무패 기록을 세우며 내리 달리자 사람들은 이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러다 시즌 우승까지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꺼낼 정도다. 우승의 기대가 터무니없지 않은 게 17 경기를 치르며 시즌 중반을 넘어 선 지금 라이프치히는 2위 자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동안 분데스리가 최강팀인 FC 바이에른 뮌헨을 제치고 몇 번이나 1위 자리를 빼앗기도 했다. 최근 한국 매체에도 RB 라이프치히의 활약을 다룬 뉴스가 종종 보도되는 걸 보면서 라이프치히의 돌풍이 독일 안팎으로 상당한 관심을 모으고 있음을 체감한다.


분데스리가 경기를 직접 보고 싶어 나는 아내와 함께 라이프치히 경기장을 찾았다. 이 날은 라이프치히 대 아우크스부르크 경기가 있었다. 예전에는 분데스리가 경기를 보려면 다른 도시로 가서 봐야 했는데, 이제 멀리 가지 않고도 분데스리가 경기를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특히 이날 경기는 구자철과 지동원이 뛰고 있는 아우크스부르크와의 경기여서 더 기대가 됐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라이프치히 구장은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한국-프랑스전이 치러진 곳이라 한국 사람들에게는 더욱 각별한 곳이다.


ㅣ라이프치히에서 열린 RB라이프치히와 아우크스부르크의 경기. RB라이프치히 응원석은 대부분 만석이다ㅣ


우리 두 사람은 라이프치히를 응원하면서도 한국 사람인지라 덩치 큰 독일 선수들 사이에서 죽을힘을 다해 뛰는 구자철, 지동원 선수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은 이날 전반전부터 함께 출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당당히 활약하는 두 선수의 모습에 마음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나와 아내는 이날 라이프치 응원석에서 신변의 안전을 위해 큰소리치지는 못하고 눈치 봐가며 두 선수를 열심히 응원했다. 다행히 이 날은 지동원 선수가 골을 터트리는 장면을 보는 행운도 있었다. 979일 50경기 만에 터진 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라이프치히가 아우크스부르크를 2대 1로 이겨서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묘한 감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경기도 재미있었지만, 관중들의 열정적인 응원도 경기 못지않게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과묵한 독일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눌러두었던 에너지를 다 푸는 건가 싶었다. 퇴근 후 가족 친구들과 분데스리가 경기를 관람하며 맥주를 들이켜면 정말 하루의 피로가 단방에 날아갈 것 같다.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RB 라이프치히의 활약으로 이런 즐거움을 전보다 더욱 잘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분데스리가를 남의 집 잔치처럼 볼 수밖에 없었던 이곳 시민들에게 통일 후 26년 만에 찾아온 의미 있는 변다.



글: 오정택 ㅣ leipzig.korea@gmail.com

사진: 라이프치히 프로젝트 ㅣ leipzig.kor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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