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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먹거리 실종 사건

사라진 동독 먹거리의 흔적을 찾아서


"너희들은 맨날 뭐 먹어?"


설날을 맞이해 떡국이나 한 그릇 대접할까 하고 독일 친구들을 초대했다. 호록호록 떡국을 두 그릇째 비우고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독일에 사는 이들이 다들 그렇듯 나 역시 궁금했다. 이런 '요리 불모지'에선 도대체 뭘 먹고 사는지.


"거의 학교 식당에서 먹지. 파스타 같은 거."

"아니, 파스타, 되너, 쌀국수 그런 거 말고 독일음식."

"그거 독일 음식인데?"

"?!"


"이제 그거 다 독일화 되어서 독일 음식이야. 현지랑 다를 걸?"


호오, 그럴 듯한 농담이다. 하지만 터키, 베트남, 이탈리아 요리가 독일스럽다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독일 내에서 자국의 음식을 팔아 온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럼 이 음식들은 언제 이곳으로 이민을 온 것일까. 


여긴 '주체성'을 강조했던 사회주의의 심볼, 라이프치히다. 외래 문물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그러한 음식들이 존재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난 통일에 의해 개방되기 전 동독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곳 사람들의 '입 맛'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통일이 되기 전, 

동독에서 이국적인 요리를 맛보려면 

고급 호텔 레스토랑에 가야만 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영향을 막고 '주체성'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드물었고 있어봐야 고작 일식이나 프랑스 요리 정도였다. 서민들에게 낯선 외국 음식을 먹는 다는 건 그 나라에 여행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독일에 케밥도 쌀국수도 피자도 없다니. 독일에서 독일 음식만 먹는다는 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절엔 그게 당연한 현실이었다.


l 구동독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슈퍼마켓, '콘줌'ㅣ


주민들은 장을 보러 

콘줌(Konsum)에 갔다. 


현재 독일에서 가장 흔한 마트라 할 수 있는 레베도 에데카도 없었다. 오로지 콘줌이었다. 콘줌은 2차대전이 끝난 해인 1945년 소련 군사정부의 명령에 의해 설립된 소비협동조합이 모태다. 1948년 소련이 통치한 지역 내에 290개 지점이 생겨나면서 동독을 대표하는 상점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만성적인 물자 공급 문제에 시달리면서 늦게 가면 상품이 없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일찍 가서 상점 앞에 늘어선 뱀 같은 줄의 꼬리를 붙잡아야 했다.


l  그 시절, 장 보러 나온 주민들의 긴 행렬은 매우 익숙한 풍경이었다  l


브로일러(Goldbroiler)를 위한 생 닭 한 마리와 카페믹스(Kaffee-Mix) 한 봉지를 산다. 분위기를 띄워 줄 샴페인 롯트캡셴(Rotkäppchen)과 비타콜라(Vita Cola)도 한 병씩 산다. 바나나는 오늘도 없다.


특별한 날이면 닭 한마리를 통째로 구운 바비큐, 골드브로일러를 먹었다. 그 어떤 행사를 가도 브로일러가 있었다. 별다른 조리법은 없었다. 그냥 오븐에 굽기만 하면 된다. 주민들은 말한다.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고. 방법이 얼마나 많은데! 라고 답답해 할 필요 없다. 독일 생활 4년차, 나도 이제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ㅣ닭 한마리 통째로 구운 브로일러, 맛나다! ㅣ


1977년 브라질에서의 커피 흉작으로 전세계에 커피 파동이 일었다. 동독 정부는 커피가 급해졌다. 정부는 새로운 커피 정책을 내놨다. 저렴한 브랜드인 'Kosta'는 모습을 감췄고 25%까지 비싼 론도(Rondo)와 모나(Mona)가 등장했다. 소비자는 분노했다. 그래서 커피와 다른 곡물과 반반씩 섞은 카페믹스를 선보였지만 곡물에 들어있는 단백질 성분들은 필터를 막히게 해 커피 머신들을 망가뜨렸다.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만족하고 사는 수밖에. 그런 이유로 외제 커피는 동독인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었다. 1980년이 지나서 정부는 브라질을 잇는 세계 두번째 커피생산국이자 우호국이었던 베트남과 수입계약을 체결하고 직접 현지에서 생산에 나서기도 했다. 



다행히 커피는 그렇게 수습이 되었지만 바나나는 대책이 없었다. 생산국들과 우호적인 관계가 없었던 동독정부는 통일이 될 때까지 주민들의 불만을 두 눈 질끈 감고 듣고만 있어야 했다. 맛도 잘 모르는 바나나를 왜 그리 좋아했는지 납득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도 힘든 시절 비슷한 상황을 겪은 걸로 봐선 인류의 DNA 속에 바나나 맛을 원하는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그 덕에 바나나는 동독의 공급 부족을 상징하게 되었고 많은 조롱과 농담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바나나를 나침반으로 쓰는 방법은? 

정답: 장벽 위에 올려 놓고 베어 먹힌 쪽이 동쪽이다. 


독일식 유머치곤 나름 나쁘지 않다. 


l 이제는 구동독지역에서도 흔해빠진 바나나 ㅣ
ㅣ 롯트캡셴과 비타콜라 ㅣ


롯트캡셴과 비타콜라는 

통일의 풍파 속에서 살아남은 대표적인 브랜드다. 


빨간망또를 뜻하는 롯트캡셴의 이름은 빨간 병마개에서 비롯되었고 1894년 라이프치히 근교 도시인 프라이부르크(Freyburg)에서 탄생했다. 양조장은 동독 소유의 인민기업(VEB)이 되었다가 통일 후 위기를 맞았지만 다행히 발빠른 민영화와 소비자들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롯트캡셴은 인기가 좋을 수 밖에 없는게 샴페인 치고 저렴하고 종류가 다양해 음료수처럼 부담없이 구입할 수 있다. 샴페인은 보통 뻥 터뜨리고 치솟는 거품을 여기저기 뿌려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깝지 않은 가격과 양이 그 비결이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맛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맛도 좋다.


비타콜라는 라벨 디자인에서 느껴지는 촌스러움으로 단박에 동독 브랜드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일단 한 번 먹어보면 바닐라 향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코카콜라는 눈에 들어 오지도 않는다. 비타콜라는 1958년 동독 정부의 두번째 '5개년 계획' 속에 포함된 '인민을 위한 음료 공급 개선'이라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화학공장 밀티츠(Miltitz)에서 개발되어 1960년엔 106개 회사가 제조를 허가 받았다. 통일 후에도 생산은 튀링엔의 한 민간 기업에 맡겨졌지만 그 위상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현재에도 구 동독 지역에선 코카콜라의 뒤를 이어 시장 점유율 2위, 튀링엔 주에선 1위를 달리고 있다. 실제로 마트에 가보면 음료수 코너에서 비타 콜라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무려 콜라 종류만 다섯, 레몬에이드도 다섯이나 된다. 


역시 군것질은 켓부어스트(Ketwurst)와 

그릴레타(Grilletta)만한 게 없다.


l  켓부어스트(좌)와 그릴레타(우)  l

켓부어스트는 케첩과 독일말로 소시지를 뜻하는 부어스트의 합성어다. 구멍이 뚫린 길다란 빵 안에 케첩을 채우고 굵은 소시지를 삶아서 끼워 넣으면 끝이다. 간단하지만 굉장히 먹음직스럽다. 사실 지금도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치는 복부어스트(Bockwurst)와 모양만 다를 뿐 크게 달라 보이진 않는다. 그래서 먹어보진 않았지만 왠지 맛을 알 것만 같다. 


그릴레타는 쉽게 말해서 그냥 햄버거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빵 사이엔 고기 패티 한 장이 전부다. 소스는 케첩 밖에 없고 치즈나 오이는 별도 추가해야 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역시 동독의 '외식업 합리화 연구센터 (Rationalisierungs- und Forschungszentum Gaststätten)'에 의해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켓부어스트는 1977년에 그릴레타는 1982년에 베를린에서 판매를 개시해 동독을 대표하는 길거리 간식이 되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그때 그 맛과 함께 추억을 팔고 있는 점포를 볼 수 있다. 


통일이 되자 

동독의 모든 먹거리가 뿔뿔이 흩어졌다.


1989년 장벽의 무너진 틈으로 자본주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가장 먼저 먹거리들이 모조리 쓸려 나갔다. 맥도날드가 그릴레타를 발로 차 버렸고, 코카콜라가 비타콜라의 목을 죄었다. KFC가 브로일러를 기름에 튀겨버렸고, 대형 마트들이 콘줌을 구겨서 구석에 던져 버렸다. 황금 같던 바나나는 오이만큼이나 흔해졌고 카페믹스는 스타벅스 앞에서 물처럼 녹아 내렸다. 이제 더 이상 슈퍼 앞에 줄을 설 필요도 없었고, 공급부족은 상상할 수도 없이 다양하고 많은 상품들이 넘쳐났다. 거리에 즐비한 터키, 베트남, 이탈리아 음식점들은 알 수 없는 말로 알 수 없는 메뉴를 팔았다. 세상은 분명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 


통일 후 27년이 지난 지금 동독 지역에서도 '동독스러운' 음식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라이프치히 중심가엔 이제 '자본주의' 출신의 패스트푸드점들이 익숙한 듯 자리하고 있다. 더 이상 이상할 것도, 낯선 것도 없다. 동독 시절의 음식이 오히려 비일상적인 진귀한 것이 되었고 그때의 식문화는 추억거리가 되어버렸다. 입맛은 변한다. 먹거리라는 게 동시대에 존재하는 문화의 일부라면 현재에 맞게 변화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배가 더부룩한 건 공허한 가스가 많이 차서 그런가?






글: 진병우 l  leipzig.korea@gmail.com

사진: 라이프치히 프로젝트 

www.grillsportverein.deforumthreadsgrillen-mit-onkel-erich.196515

www.ketwurst.com

www.sueddeutsche.de/kultur/der-wortschatz-der-ddr-siechen-lernen-1.129191 

www.taz.de/!5203895


참고자료:

Mahlzeit DDR dokumentation 4부작, Phoenix

www.ketwurst.com

www.rotkaeppchen.de

www.vita-cola.de

Hollstein, Miriam: "Wie die DDR zur Bananenrepublik wurde", die Welt [2009.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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