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현실로, 경계를 넘어 연대로
무대에서 현실로: 홍콩 영화의 재현과 역사적 사건의 재연
극장에 입장하는 순간 마치 서울 한복판에서 홍콩으로 순간이동한 듯한 느낌이 든다. 홍콩 밤거리를 연상시키는 네온사인의 비디오아트가 배경을 채우고 벤치와 전화부스까지 배치되어 있다. 막이 오르자마자 영화 영웅본색의 시그니처 장면이 펼쳐진다. 총에 맞아 죽어가는 장국영이 출산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성별을 묻는 장면이 패러디로 재현되고 이어지는 복수를 위한 총격전은 마치 90년대 홍콩 누아르 영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 순간 홍콩 영화의 향수에 젖어 있던 관객들을 현실로 끌어내리듯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이윽고 배우들이 실제 홍콩 배우가 아니라 한국의 장국영 팬클럽 회원들이며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홍콩에서 장국영의 16주기 추모 영상을 찍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명작옥수수밭의 연극 <굿모닝 홍콩>(연출 최원종, 극본 이시원)은 110분 동안 홍콩에서 벌어진 시위 장면과 장사모(장국영을 사랑하는 모임)가 재현하는 홍콩 영화의 장면들이 교차하며 반복된다. 천녀유혼 패러디 장면에서 비디오 아트를 십분 활용해 무협 영화의 슬랩스틱을 구현하다가도 시위대가 밀려들어 장사모 회원들과 함께 “프리 홍콩”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이어진다. 관객들은 영화의 감상에 빠져들다가도 어느새 홍콩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한가운데 서게 되며 극 몰입과 거리 두기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독특한 체험을 하게 된다.
<굿모닝 홍콩>은 동일한 전개를 반복하며 의도적으로 감정 몰입을 깨뜨려 관객이 현실을 다시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장사모가 장국영 영화를 연기하는 것은 과거 영화의 “재현(Representation)”이지만 배우들이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현장을 연기하는 순간 과거 역사적 사건을 다시 수행하는 “재연(Reenactment)”이 된다.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를 연상시키는 연출은 연극이 단순한 연극의 재현을 넘어 하나의 역사의 재연으로 나아가 게만든다.
극중극 천녀유혼에서 무협 배경이 벽에 비춰지는 순간에도 이미 새져진 “광복 홍콩”의 문구는 지워지지 않는다. 이 연출 역시 현실이 계속해서 연극적 상황을 뚫고 들어온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연극 내내 생생한 사운드와 무대를 가득 채우는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시위 현장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로 인해 관객은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시위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존재로 자리한다.
연극이 끝난 후 관객이 극장을 나서는 순간에는 2019년 홍콩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당연히 누리고 있다고 믿었던 자유가 실은 너무나도 쉽게 깨질 수 있음을 체감하는 2025년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방금까지 무대 위에서 펼쳐졌던 홍콩 시위 장면과 현실의 탄핵 시위가 겹쳐지며 현재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낯설게 바라보며 주의를 관심을 환기하게 된다. 이 행위 자체가 또 다른 ‘재연’이 되고 연극이 현실 속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는 ‘포스트 재연 효과’를 만들어낸다.
<굿모닝 홍콩>은 재현과 재연, 현실과 가상(영화)의 경계를 허물며, 홍콩 송환법 시위라는 과거의 역사적 비극을 2025년의 한국을 살아가는 지금의 관객에게 전한다. 이 작품은 연극이 단순한 극적 체험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한다.
배타성에서 연대로 :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경계 허물기
극의 초반에는 송환법 반대 시위 현장이 장국영 16주기를 맞아 홍콩을 찾은 장사모 회원들에게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들은 홍콩 시내에서 장국영의 영화 장면을 재현하며 추모 영상을 촬영하려 하지만, 시위가 격화되면서 계획대로 영상을 찍기 어려워진다.
처음에 장사모 회원들은 홍콩 시민과 자신들을 철저히 구분한다. 시위에 참여하는 ‘그들’과 여행을 온 ‘우리’는 서로 다른 목적과 상황 속에 존재하며 외국인으로서의 지위는 홍콩의 정치적 현실과 거리를 두는 안전장치처럼 작용한다. 마치 시위를 먼 곳에서 지켜보듯 장사모 회원들은 홍콩의 현실을 자신들의 일과 분리하고 외면한다. 시위에 개입하지 말라는 외교부와 한인 사회의 권고 역시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장사모 회원들 역시 점차 홍콩의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800만 원짜리 장국영 에디션 나이키 조던 운동화를 찾으러 겁 없이 시위 현장에 들어간 기철이 시위대의 도움을 받는 장면, “천녀유혼” 패러디 영상을 촬영하다가 시위대의 물결에 휩쓸려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녹아드는 장면은 그들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홍콩 시민과 자신들 사이에 그어 놓았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을 보여준다.
나아가 외국인으로서 장사모 회원들이 겪는 홍콩 시민들과의 소통의 어려움은 오히려 배타적인 태도가 연대로 전환되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홍콩 시민들은 장사모 회원들을 자신들의 시위에 동참한 연대자로 오해하고 회원들은 이를 해명하려 하지만 제한된 언어 능력으로는 복잡한 외교적 입장 차이를 설명하기 어렵다.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얼굴을 찌푸리던 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BTS와 장국영 같은 고유명사만은 서로에게 통한다. 이때 양측은 문화적 공감대를 발견하며 예상치 못한 연결 지점을 체감하게 된다.
이어서 장국영의 “월량대표아적심”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자 모여 있던 이들은 국적과 배경을 넘어 함께 노래하고 서로를 껴안는다. 이 장면은 인간이 아주 작은 문화적 요소만으로도 깊이 연결될 수 있음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 경험을 공유한 이후 홍콩 시민들에게 장사모 회원들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다. 서로의 노래가 하나로 합쳐지고 서로의 아픔이 하나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홍콩 경찰이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자 장사모 회원들은 시위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맞선다. 이는 앞서 홍콩 시민들과 얼싸안으며 나눴던 감정적 연대와는 또 다른 차원의 연결로 이들과 함께 행동함으로써 새로운 얽힘을 만들어낸다. 홍콩 상황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면 안전은 보장되었지만 이는 현실을 외면하라는 암묵적인 압박이기도 했다. 과거에는 그 조건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던 이들이 이제는 홍콩 시민과 하나 되는 경험을 통해 그들의 현실을 곧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학생 시위대를 보며 과거 시위 경험을 떠올리는 정환처럼 이 연극은 인권이 훼손되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현실의 인식은 물리적 거리를 초월해야 한다. 연극 속에서 홍콩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언급하는 순간 관객들은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나와 무관하다는 생각이 얼마나 쉽게 무관심으로 이어지는지를 깨닫게 된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내전과 억압을 단순히 먼 나라의 일로 치부하며 외면했던 우리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한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되게 하는 힘: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서
장사모 4인방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작품은 각자의 사연을 깊이 조명하기보다는 장국영 팬클럽이라는 집단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다. 장사모에게 장국영은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여읜 동생과 이어주는 매개이자 외로운 시절을 지켜준 등불 같은 존재로 네 인물의 가장 소중한 기억과 맞닿아 있다. 장국영을 기억하는 장사모의 마음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좋아하는 마음"이야말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임을 보여준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빛난다. 어쩌면 그 대상이 무의미하고 쓸모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연극은 좋아하는 존재가 우리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장사모는 장국영을 추모하며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번 여행으로 현도는 한국으로 돌아가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로 결심하고 기철이 고가 신발 리뷰 방송 대신 홍콩 시위 현장을 카메라에 담기로 한다. 장사모는 이번 여행을 통해 과거로부터 한 걸음을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인다. <굿모닝 홍콩>은 그토록 사랑했던 장국영을 가슴에 품은 채 조금씩 변화해 나가는 장사모의 여정을 통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때로 붙들고 있던 것을 놓을 필요가 있음을 전한다.
<굿모닝 홍콩>은 장사모을 통해 ‘좋아하는 마음’을 통해 연대가 형성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 감정은 나와 타인, 우리와 타 집단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연결의 출발점이 된다. 장국영을 향한 애정으로 모인 장사모 회원들이 극 중에서 홍콩 시민들과 하나가 되는 순간 그들은 좋아하는 마음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고 연대를 실천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굿모닝 홍콩>은 진심으로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신만의 장국영 같은 존재를 가슴에 품을 수 있다면 그 애정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