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을 유보하는 이야기의 힘에 대하여
이민자는 ‘흩어짐’이라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의미처럼 분산된 정체성을 지닌다. 이들의 정체성은 모국과 이주국의 경계 위에 놓여 있으며 두 세계가 교차하는 벤 다이어그램의 교집합처럼 양쪽을 아우른다. 두 세계의 교차 지점에 있으면서도 어느 한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민자는 결국 그 경계 위를 부유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연극 <엔들링스>(작 셀린 송, 번역 조은정·임지윤, 연출 이래은, 2025.05.20.~ 2025.06.07., 두산아트센터 Space111)는 1.5세대 한국계 미국인 하영을 중심인물로 삼아 동시대 이민자의 중첩된 정체성과 이주국에서 자리를 잡고자 하는 욕망을 그려낸다.
<엔들링스>는 한국인과 미국인의 경계에 놓인 하영의 정체성처럼 두 개의 서사가 교차하는 메타극 구조를 취한다. 하나는 하영이 창작한 희곡으로 전라남도 만재도의 해녀들을 다룬 극중극이고 다른 하나는 백인 중심의 뉴욕 연극계에서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작품을 완성해가는 하영의 창작 과정이다.
동시대 이민자인 하영은 이주국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인물이다. 하영은 대학원 시절 책상 위를 백인 극작가들의 사진으로 채웠다고 고백하며 "피부색을 팔아서 작품을 쓰기 싫다" 고 말한다. 이러한 하영의 발언과 행동에는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주류 사회의 기준에 맞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내포되어 있다. 하영이 소위 '백인 연극'을 쓰며 이주국의 주류 사회에서 입지를 다지려 애쓰는 과정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점차 주변부로 밀려난다.
작가 레지던시와 지원금 프로그램의 수혜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는 백인 연극계이다. 이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은 하영이 오랫동안 외면해 온 이민자 정체성을 다시 마주하게 만든다. 결국 하영은 자신이 써왔던 연극의 틀에서 벗어나 한국의 해녀들을 주제로 한 <엔들링스>를 창작한다. 그러나 <엔들링스>를 백인 남편에게 보여주자 남편은 “나는 당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내용을 쓸 수 없고 따라서 당신이 쓴 것을 부러워할 수도 없다”고 한다. 남편은 발언은 ‘이 작품은 오직 이민자인 너만 쓸 수 있다’는 인정이지만 동시에 ‘나는 그런 것을 쓸 필요도, 쓰고 싶지도 않다’는 거리두기의 태도를 드러낸다.
이 장면은 아시아계 이민자인 하영과 백인 남편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드러내며 하영을 타자화한다. 두 사람은 쥐가 출몰하는 뉴욕의 비좁은 아파트에서 함께 살아가지만 미국 사회에서의 위치는 명백히 다르다. 남편은 목에 걸린 ‘백인 남편’이라는 팻말이 상징하듯 백인이라는 귀속 지위를 타고났기에 백인 연극을 쓰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반면 하영은 아무리 백인 연극을 쓴다 해도 백인이 될 수 없다. 이민자로서 정체성을 지운 채 이주국의 내부자로 완전히 편입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러한 현실은 하영에게 깊은 좌절을 안긴다.
이민자는 외부 세계와 맞닿는 접점인 신체를 통해 자신의 이민자성을 가장 강렬하게 체감한다. 외모와 신체는 인종적 특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엔들링스>는 신체적 특징으로 인한 타자화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극 중 하영이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부동산’은 이민자로서 느끼는 불안과 배제 가능성이 신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제시된다.
한국계 1.5세대 미국인 캐시 박홍은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에서 이민자의 삶을 “연성 파놉티콘” 속에 사는 상태로 비유한다. 1) 연성 파놉티콘이란 과거처럼 노골적인 감시를 받지는 않지만 이민자가 주류 사회의 감시구조를 내면화한 채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게 되는 상태를 뜻한다. 박홍은 “이 감시 구조가 얼마나 깊이 내면화되었는가”에 따라 이민자의 “조건부 실존”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하영도 이민자로서 연성 파놉티콘을 내면화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조건부라는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다. 미국 사회로부터 배제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하영은 스스로를 감시 구조 안에 가둔 채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며 백인들의 인정을 받고자 애써왔다. 부동산을 향한 하영의 갈망은 겉으로는 뉴욕의 마천루처럼 치솟은 시세 속에서도 자가를 마련하려는 경제적 욕망이다.그러나 그 이면에는 발 딛고 설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함으로써 미국에서 조건부가 아닌 거주 자격을 확보하려는 이민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
후반부의 “내 몸으로 뉴욕 전체를 뒤덮고 싶다”는 하영의 독백은 욕망이 신체 정체성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독백은 음성의 발화에 그치지 않고 투사된 활자가 스크린 위를 점유하면서 ‘뒤덮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이미지 차원에서 드러낸다. 독백에서 강조되는 ‘몸’은 아시아인으로서의 외모와 신체적 특성과 분리될 수 없기에 곧 하영의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과도 연결된다. 부동산을 향한 하영의 열망은 백인 연극계 안에서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겠다는 의지로 확장된다. <엔들링스>는 정체성의 투쟁이 펼쳐지는 아시아적 신체를 중심으로 백인이 주류 계층으로 자리 잡은 공간을 전복하려는 동시대 한국계 미국 여성의 솔직한 욕망을 조명한다.
모국과 공간적으로 단절된 이민자의 삶에서 자신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연결 고리는 혈연이다. 혈연은 단순히 가족이라는 범주를 넘어 모국의 정체성과 문화를 공유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민자에게 혈연은 정체성을 자각하고 유지하는 하나의 경로가 된다. <엔들링스>에서도 해녀들과 하영이 공간의 제약을 넘어 혈연과 소통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한솔은 새벽녘 타국에 거주하는 손녀와 전화로 안부를 나누고 ‘화이트 플레이’ 장면에서는 하영이 한국에 있는 할머니와 통화한다.
화이트 플레이 장면에서 하영은 백인 관객들 사이에서 백인성을 과장한 퍼포먼스를 관람하며 불쾌감을 느낀다. 그때 극장에 울려 퍼지는 휴대전화 벨소리는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하영을 한국에 있는 할머니와 연결시킨다. 할머니와의 통화는 이민자인 하영이 한국인으로서의 근원과 다시 접촉하게 되는 순간을 상징한다. 동시에 백인 연극이 상연되던 극장에서 울려 퍼지는 벨소리와 한국어는 공연의 흐름을 중단시키며 주류 사회의 제도적 질서에 균열을 가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화이트 플레이’ 장면은 하영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인식하고 백인 중심의 연극 틀에서 벗어나는 전환점이 된다.
<엔들링스>는 하영과 해녀들 사이의 혈연관계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그들의 삶을 병치한다. 하영은 섬에서 자녀를 멀리 떠나보내고자 했던 해녀들의 염원이 태평양을 건너 실현된 존재로 그려진다. 또한 바다를 건너 뉴욕으로 향한 하영의 이민과 생계를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해녀들의 잠수를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해녀들의 잠수를 또 다른 형태의 ‘이민’으로 비추기도 한다. “바다를 관짝처럼 들락거린다”는 대사와 함께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에서 배우의 동선은 무대를 벗어나 객석으로 확장된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연출은 해녀들의 잠수를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으로 묘사한다.
하영과 해녀들의 삶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개인의 체험을 보편적 서사로 확장하고 혈연 중심의 관계를 한국 여성 간의 연대로 전환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그러나 1만 킬로미터 떨어진 만재도와 뉴욕을 잇는 <엔들링스>의 시도는 장롱을 뒤집어 뉴욕의 빌딩 숲으로 전환하는 무대 연출만큼 간단하지 않다. 하영이 극 중 해녀들을 창조한 작가이며 해녀들이 하영이 만든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혈연관계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극 특유의 복잡한 구조와 하영과 해녀들 사이의 관계가 명확히 설정되지 않은 점은 극의 흐름을 직관적으로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멸종된 종의 마지막 개체”를 뜻하는 ‘엔들링스’라는 개념은 해녀들에게서 비롯되었지만 하영과 명확히 연결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왜 이 작품의 제목이 엔들링스인지에 대한 의문이 끝내 해소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엔들링스〉는 이민자 작가가 영어로 집필하고 미국에서 초연된 후 한국어로 윤색되어 공연되기까지 여러 번의 ‘이민’을 거친 작품이다. 극 중 공연 관람 행위를 이민에 비유하는 장면처럼 하나의 세계를 다른 세계로 옮기는 과정에는 오해와 왜곡이 수반된다. 번역과 재맥락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서사의 비약이나 다소 매끄럽지 않은 전개는 오히려 이 연극의 ‘이민자 정체성’이 제작 과정 전반에 반영된 결과로도 읽힌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왜 이 작품의 제목이 엔들링스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영이 자신의 피부색을 예술의 소재로 삼은 데 대해 죄책감을 토로하자 해녀 한솔은 “우리를 내주고, 맞바꾸고, 버리라”는 말과 함께 영정 사진을 건넨다. 작가 하영과 그가 창조한 인물 한솔이 연결되는 결말은 비혈연 관계이자 허구의 인물인 한솔이 하영을 격려하면서 현실과 허구, 세대를 초월한 여성 간의 연대를 무대 위에 구현한다. 나아가 한솔의 대사는 이민자 정체성을 지닌 하영의 연극이 만재도에서 평생을 살아온 해녀들을 또 다른 세계로 이주시키는 일종의 ‘도하(渡河)’임을 암시한다. 엔들링스가 되고 싶었던 해녀들은 하영의 이야기 속으로 잠겨 들어가 뉴욕에 도달하고 끝내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는다.
1)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노시내 옮김, 마티,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