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차 직장인의 부캐, 포르투갈어 유튜버: 유튜브가 주는 묘한 성취감
나는 브라질 사람을 대상으로 유튜브 채널을 한다. 포르투갈어로 브라질과 한국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내가 느꼈던 브라질에서의 1년 3개월간의 삶에 대해서, 브라질 사람과 문화에 대해 다루기도 하고 한국의 문화나 한국 사람의 일상에 대해 소개하기도 한다. 작년 2월에 시작했고, 운이 좋아 2020년 8월 현재 12.8만명의 구독자가 있다.
주위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대부분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포어로 유튜브를 할 생각을 다 했어? 포어 엄청 잘하는 가보다!" 포르투갈어는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정도만 한다. 그래도 그냥 시작했다.
그러게, 내가 왜 이 브라질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을까. 쉬어야 하는 일요일에 왜 영상 편집이나 하고 있을까. 포르투갈어라 구독자들이 남기는 댓글도 100% 다 이해하지 못하고, 찍을 때마다 우리말로도 쓰기 벅찬 대본을 왜 포르투갈어로 쓰고 앉아 있을까. 나는 평범한 직장인인데 왜 기발한 콘텐츠 고민하느라 노트북 앞에서 멍때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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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이야 10만 정도 채널이면 그래도 왠만한 직장인 월급 정도는 벌겠다,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유튜브 생태계는 크리에이터 광고가 활성화되어 있어 몇 만 정도 테크 유튜버도 쉽게 광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다. 또한 유튜브 영상에 붙는 광고만으로는 생활하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영상 광고는 수익이 낮은 편이지만 그나마 우리나라는 광고 단가가 브라질보다는 훨씬 높은 편이다.
전적으로 내 채널 기준이지만, 브라질 유튜브 채널에서 1달러 수익이 발생한다고 치면 우리나라는 3-4배가 높다. 미국은 7-8배 수준이다. 비슷한 조회수의 영상이라도 유튜브 영상 광고 단가가 높은 미국에서 플레이 되면 7-8배 높은 수익이 난다. 브라질 유튜브는 브라질 물가를 감안해도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한 마디로 돈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1주일에 1개 정도의 영상도 올릴까 말까 하기 때문에 수익을 생각할 수는 없는 단계다.
처음에 시작한 건, 브라질에서 열심히 배운 포르투갈어를 까먹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국에 돌아갈 날이 몇 달 남지 않았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포르투갈어를 쓸 기회가 전혀 없을 것이므로, 내가 너무 좋아했던 이 언어를 잃을까 두려웠다. 영상이라도 만들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지내면 포르투갈어를 규칙적으로 쓰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로 외국어 유튜브를 하는 건 외국어 실력에 확실한 도움이 된다. 나는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수준'(기존에 쓴 글 참조)의 외국어를 구사한다면 그 이후에는 외국어 유튜브를 하는 게 가장 좋은 공부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나라에 가서 사는 것이 베스트지만) 영상을 만들기 위해 스크립트를 쓰니 작문을 하게 되고, 편집 하면서 내내 그 스크립트를 듣게 되고, 구독자의 댓글을 실시간으로 읽으며 독해도 하게 된다. 그것도 현지인들이 매일매일 쓰는 살아있는 포르투갈어를!
영상을 약 80개정도 만들다 보니 눈에 띄게 발음이 달라진 것도 알게 되었다. 별다르게 발음을 고친 것도 아닌데 잘 전달하려고 하다보니 딕션이 좋아진 것 같다. (우리말로 하는 유튜버들도 오랫동안 영상에서 말하다보면 처음보다 훨씬 듣기 좋게 말하듯이) 브라질 사람들도 칭찬을 많이 해준다. "이네스! 너 진짜 포르투갈어 많이 늘었다! 이제 거의 니가 외국사람인지 모를 정도야!" (브라질 사람들의 친절함이란 이런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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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포르투갈어 잘 하고 싶어서 유튜브를 한다, 라고 말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포르투갈어를 좋아하지만 퇴근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는 10년차 직장인이 매 주 5-10시간을 투자해 영상을 만드는 데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아주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묘한 성취감"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매일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직장인으로서의 삶 한켠에 '나는 그래도 유튜브 크리에이터야'라는 조금 뿌듯한 마음. 직장에서는 늘 같은 곳에 머무는 느낌 혹은 뒤쳐지는 것 같은데 그래도 내 채널은 조금씩 구독자도 조회수도 조금씩 성장할 때의 기분. <놀면 뭐하니?>가 유행시킨 '부캐'를 나도 하나 가지고 있는 느낌. 회사 일 말고 몰두할 무언가가 주는 안정감 같은 것들. 이것들이 나에게 "묘한 성취감"을 준다. 고맙게도.
회사 일은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고 내가 오롯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는데, 유튜브 채널은 다 내맘대로 할 수 있다. 온전히 내 것이다. 조회수가 잘 나와도 내 덕이고, 잘 안 나와도 내 탓이다. 재촉하는 사람도 없다. 내가 빨리 올리고 싶으면 영상을 빨리 올리고, 내가 올리고 싶지 않으면 이번주에는 업로드를 미뤄버려도 된다. 직장인으로서는 꿈도 못 꿀 그런 자유.
회사가 원하는 방향 말고, 상사가 좋아할 만한 무언가가 아닌 온전히 내가 만든 콘텐츠. 내가 기획하고 대본 쓰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썸네일 만들고 업로드한, 내 저작물. 직장인이 아닌 브라질과 포르투갈어를 사랑하는 '이네스'의 공간.
아마도 나는 온전히 '내 것'인 채널이 좋아서, 조금씩 성장하는 그 뿌듯함이 좋아서 굳이 계속 하고 있나보다. 오랫만에 연차를 썼는데도 결국에는 노트북 앞에 앉아 편집을 하고 앉아있었지만, 그 채널이 주는 기쁨은 연차 날 몇 시간보다 더 값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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