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르메 Dec 07. 2022

아무튼, 책

지구 밖 입장 가능 암호는 b.o.o.k

“엄만 다시 태어난 것 같아. 차례나 순서도 없이 너희들과 같이 커가던 엄마가 다시 태어났어. 이젠 말할 수 있겠다. 그간 혼자 간직하고 있던 우리의 목표를 말이야. 엄마가 먼저 결정한 우리의 목표는 함께 책을 읽는 것이었어. 어제 너희들이 읽었던 책이 오늘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기를 바랐고, 오늘 엄마가 읽은 책들이 내일 너희들 책상 위에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랐어. 궁극적 목표는 너희들과 같은 책을 읽고 다른 느낌을 나누는 것이었지. 처음엔 알지 못했어. 우리가 책의 바다에 빠질 수 있을지 말이야. 엄만 그래도 어른이니 가능할 거라 예상했었어. 대학생이 되고 제일 재미있었던 일이 쇼핑 다음으로 서점가는 일이었으니 책의 바다는 아니더라도 책의 연못에 발 정도는 담그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랬던 우리였는데 지금 엄마는 [아무튼, 책]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네. 너희들 덕분이야. 고맙고 사랑해. 나의 전부들.”

서점을 방문하면 소설책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혹여나 동선이 꼬여 소설 코너에 잘못 들어가더라도 책 표지만 구경하고 디자인 서적 코너로 이동하기 바빴다. 사진만 나열되어있는 책을 좋아했다. 예쁜 그림과 사진이면 만족하는 눈을 가졌었다. 책 속의 글자는 주인공을 빛내기 위한 조연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책 속의 사진이고 싶었다.


비주얼에 반해 맛보는 메뉴처럼 멋있어 보이는 직업이 좋았다. 미술 전공을 하고 디자이너로써의 삶을 살았다. 원하던 삶이었다. 내가 선택한 삶이 좋았다. 트렌드의 흐름 속에 발을 담그고 있어야 하는 일이 좋았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야 하고 새로운 눈을 가져야 살아남았다. 어제와 오늘이 달라야 했다. 그런데 내 눈앞엔 어제와 오늘이 같고 내일과 모레마저 같은 그런 아이들이 둘이나 있었다. 그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내 눈에 담아 가며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계속해 나갔다. 살다보면 직감적으로 알게 되는 일이 있다.


'나를 꿈꾸게 하는 이 일을 얼마 못하겠구나.'


내 시점은 일에서 아이들로 옮겨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나의 일상 아주 깊은 곳 까지 들어와 있었다. 기본값은 ‘나’ 였지만 이제 그 기본값 자체를 바꿔야 할때였다.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하게 된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과감하게 온라인 사업 정리를 했다. 의식 전환 스위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폐업 신청 후 드라마틱하게 아이들을 케어하지는 못했다. 일단 육아에서 최대 단점으로 꼽히는 집안일과 밥하는 걸 어려워했다. 시장조사가 길들여진 습관은 여전히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 헤매었다. 매일 무언가 새로운 아이템이 눈에 들어와야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 밖을 나가는 이유였다.


고치고 싶은 습관들이 아이를 출산하며 겪는 진통들과 함께 내 몸 밖으로 빠져나가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은 어떤 새로운 아이템들이 있나 하고 쇼핑몰을 기웃대다가 그저 눈으로 만족해야 하는 날들이 겹겹이 쌓였다. 언제쯤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을까를 날마다 생각하며 잠들 땐 언제나 아쉬웠다. 집에서도 연장된 쇼핑중독쯤 되는 취미생활은 이제 아이들 책으로 넘어왔다. 예쁜 책을 사주려고 인터넷 쇼핑을 했다. 책이 예뻐서 그냥 구입했다. 집 책장에 진열해놓고 만족했다. 책이 있으니 꺼내 읽기도 했다.


미약하게나마 책에 노출이 되고 나니 불현듯 서점과 도서관 다니던 취미생활이 떠올랐다. 집 밖으로 돌아다니기에 적당했던 곳. 어린이 도서관으로 놀러 다녔다. 그 무렵 알게 된 한 육아서. 그 육아서가 지금 이 길의 첫 계단이었다. 정리정돈을 잘 못해도 된다고 북돋아 주던 육아서가 있었다. 읽다만 책들이 거실 바닥에 나뒹굴어도 괜찮다고 응원해주던 작가였다. 용기 내서 책과 함께 놀았다. 그렇게 집 바닥에 책이 떠다니게 되었다. 책의 바다라며 헤엄치고 다니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 육아서를 읽고 난 후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놀이터가 집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집이라는 공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집순이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책이 장난감인 줄 알고 가지고 놀았던 돌쟁이 아이들이 이제 초등 6학년(큰별)과 3학년(작은별)을 마무리하고 있다. 우린 지금 책의 우주에 빠져있다. 처음엔 책의 바다에 빠지는 게 목표였지만 하다 보니 스케일이 좀 커진 것 같다. 지금 우리는 광활한 책의 우주 공간을 탐험하고 싶어서 이제 겨우 지구 밖을 나가보려고 준비 중이다. 입장 가능한 또 다른 세계의 암호만 잘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지구 밖 암호는 b.o.o.k


picture_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