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몸집에 여성스러운 외모를 가졌다. 작은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A형이죠? 물곤 했다. 작정만 하면 현모양처의 가면을 쓸 수 있다. 남편은 내가 가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만나는 친구들은 너는 집에서 쿠키 굽고, 살림도 잘하지? 묻는다. 그런 소리를 남편이 들으면 코웃음을 친다. 같이 살아보라고 그래.
작은 입시학원에서 국어강사로 일할 때였다. 오후 1시에 출근해서 초등학생들 수업을 한 후에 저녁부터 중학생 국어수업을 했다. 소매 없는 원피스를 입고 카디건을 어깨에 둘렀다. 겨울이면 커다란 숄을 둘렀다. 머슴 같은 수학선생님은 내가 복사기 앞에 있으면 알아서 복사를 해 줬고, 청소할 시간이면 나보다 먼저 빗자루를 들고 우리 반을 청소했다. 내가 할 일이라곤 고맙다고 고개를 까닥하는 것이었다. 그거 하나면 머슴 같은 수학 선생님은 좋아서 웃곤 했다.
나는 잘 몰랐지만 다른 여자선생님들 사이에서 재수 없는 년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착한 여자 수학선생님은 의리로 혹은 의무감으로 여자선생님들이 모이는 술자리에 나를 불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술을 퍼마셨다. 평소에는 어려워서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던 두 여자 수학선생님의 팔을 붙들고 언니, 사랑해요를 외쳤다
멋진 수학선생님은 그 후 나를 술후배로 인정했고 우리는 제주시청의 맛난 술집을 순회하며 우정을 쌓았다. 머슴 같은 수학선생님이 떨어져 나갔다.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았다. 인연의 끈은 계속 이어져서 수학선생님은 언니가 되어 여전히 내 머리채를 붙들고 있다.
네 글이 좋아.
배짱아, 너 맨날 술 마셔야겠다. 네 글이 참 좋아
친구의 톡을 받고 감동하는 사이 언니가 연락했다. 요즘 하이볼이 맛있다는 내 말을 귀 담아 들은 언니는 구제주에 살면서 굳이 신제주까지 가는 정성을 보이며 내게 줄 술을 사고 오셨다
고마워서 소불고기를 양념해서 밀키트처럼 포장하고 언니네 집으로 달려갔다. 말도 별로 없었다. 그냥 얼굴만 봐도 좋은 거다. 그렇게 나는 고기와 양주를 바꿨다.
나는 매우 이기적이지만 받은 것은 고마워할 줄 아는 예의 있는 베짱이다. 언니가 애써 사온 짐빔으로 하이볼을 만들고 저녁도 하기 전에 시원하게 인증샷을 남겼다. 이날 어떤 글을 썼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술을 많이 마셨으니까.
중학교 2학년 11월에 만난 첫사랑을 고3까지 좋아했다. 나의 첫사랑이자 모든 마음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편지를 참 많이도 썼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어도 그냥 내가 좋아서 썼다. 밤마다 편지를 쓰고 다음 날 그에게 건넸다.
막내동생의 상견례날 그는 사돈집 큰 아들의 자격으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웃으며 잘 지내냐고 물었다. 잠깐 동안 식당 밖에 둘만 서 있었다.
그는 내가 준 편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얼굴이 빨개진 내가 버리라고 말했다.
내 동생의 남편의 형이 내가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쓴 사랑고백을 왜 간직하는지 몰랐다.
그 시절 내게 그는 진심이었다. 어쩌면 그도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간직하고 살아온 건 아닐까. 나이가 들면서 나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오롯이 나만을 바라봐줬던 그때의 누군가가 있다. 그로 인해 빛났던 내가 있다. 그 사람의 마음이 그런 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편지를 백 편이 넘게 보냈다. 중학생 시절 단테의 신곡에 빠졌던 나는 그를 나만의 뻬아뜨리체로 만들었다. 나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젊은 베르테르였다. 만일 내가 아주 유명한 작가가 되면 그는 멋지게 그 편지를 공개할지도 모른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유명해지면 안 된다.
오늘 헬스장에서 오랜만에 스쿼트를 제대로 했더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3일 동안 아주 열심히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몸에 더럽게 나쁜 것들만 몰아서 먹을 작정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술이다.
얼른 마시고 없애버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마시며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글이 술술 나오는데 어떻게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을까?
다이어트는 해야겠고, 살은 진짜 빼야 한다. 글도 써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한다. 우선순위를 생각하자.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글인가? 다이어트인가? 술인가? 미안하다. 하이볼아. 이번에는 너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