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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Sep 17. 2023

9월에는 마음이 바빠진다

며느리 입장에서 보는 벌초와 제사, 명절


9월 중순이다. 장마에는 내리지 않았던 비가 자주 오고 있다. 천둥번개까지 끌고 와서는 한바탕 난리를 피우다 가는 요즘이다. 요즘 날씨를 뭐라고 하면 좋을까. 9월이지만 나시티를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누군가는 긴 남방을 입고, 누군가는 짧은 반바지를 입는다. 날씨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요즘의 옷차림이다.




날씨는 변덕스럽지만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흘러간다. 오래전에 신청했던 학부모회에서 주관한 앞치마 만들기에 참석했다. 둘째와 셋째는 학교풍물연습을, 첫째는 바이올린 연습을 보내고 학교과학실에 가서 처음 보는 학부모들과 함께 바느질을 했다. 프랑스자수를 배웠다. 동여중의 교화인 해바라기를 수놓았는데 민들레 같았다.



순전히 예쁜 앞치마를 득템 할 생각으로 신청한 수업이었다. 추석이 지나고 얼마 안 있어 할머니제사가 있다. 우리 집에서 한다. 일을 도와주러 오시는 큰 형님께 지금까지는 다이소에서 산 앞치마를 드렸다. 이번에 잘 만들어서 선물로 드리려고 했다. 그런데 못 드리겠다. 꽃이 너무 안 예쁘다. 다이소에 프랑스자수실이랑 부자재들을 팔던데 사서 꽃이랑 잎을 좀 달아야겠다. 저 작은 꽃을 만드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남편에게 프랑스자수가 재미있다고 말했다. 

-슬슬 글 쓰는 게 슬퍼졌구나. 다른 데 눈 돌아가는 게

-아닌데, 글 쓰는 건 좋은데. 그냥 남는 시간에 한다는 거야. 근데 당신 말을 참 이쁘게도 한다.


마음 같아선 프랑스자수바늘로 주둥이를 꿰매주고 싶다.


시댁은 제사와 명절을 성대하게 차린다. 순전히 내 기준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친정에서는 제사음식을 한다고 엄마가 딱히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엄마는 밭에 갔다 와서 시장을 보고 후다닥 음식을 만들어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상을 차렸다. 전도 안 부쳤다. 떡 대신 빵을 올렸다.


시어머니는  제사에 진심이셨다. 옥상에 제사음식만 하는 부엌이 따로 있었다. 제사 며칠 전부터 멥쌀과 참쌀을 불려 떡집에 가져가서 갈아오시고는 집에서 시루떡과 송편을 만드셨다. 메밀묵을 쑤고, 동그랑땡을 만들었다. 돼지고기와 소고기적갈, 오징어적갈과 소라적을 만들었다. 제사 때마다 잡채와 회무침을 했다. 재료손질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첫제사를 준비할 때 일이다. 남편은 성산에서 이틀이나 삼일에 한번 꼴로 집에 왔다. 29살의 나는 앞집에 사는 시부모님과 항상 밥을 같이 먹었다. 아침 7시에 전화가 왔다. 

-밥 먹으러 오라.

7시, 12시, 6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와 동그란 상에 둘러앉아서 밥을 먹었다.


제사 이틀 전부터 준비가 시작했다. 형님 두 분은 제사전날 와서 나와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재료들로 제사음식을 만들었다. 전날 밤 12시까지 고기적을 두들겼다. 고기를 두들기다 졸기도 했다. 나는 산더미 같은 음식들을 과연 누가 다 먹을까 궁금했다. 어머니는 제사가 끝나면 음식들을 다 나눠주셨다. 냉장고에는 일 년 내내  전과 고기적이 있었다


시어머니가 쓰러지신 건 결혼하고 2년 후였다. 서울에서 수술을 마치고 돌아오신 시어머니는 자식들을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제사와 명절을 아들 세 명에게 나눠 주셨다. 나는 막내며느리다. 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의 제사를 맡았다. 큰 형님이 제사를 조금 간소화하자고 했다. 어머님은 떡을 집에서 만들라고 하셨지만 며느리 셋이 똘똘 뭉쳐서 그것만은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그 후로 18년이 흘렀다. 다른 집안일은 여전히 제대로 못하지만 제사음식만은 자신 있다. 형님은 가끔 부업으로 제사음식 만들기나 할까? 말을 했다. 결혼 20년 차에 제사음식의 달인이 된 우리들이다.


음력 8월 1일을 전후로 해서 제주도에서는 벌초를 한다. 예전에는 벌초방학이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추석 전에 반드시 벌초를 해야 한다. 육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도  벌초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려왔다. 추석 때 안 오는 건 이해를 했지만 벌초 때 못 내려오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추석 2주 전 일요일에 많은 사람들이 벌초를 한다. 길가에 차들이 가득 세워져 있다. 동네 식당에는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쉴 새 없이 들어온다.  가족묘가 큰 집은 종친회에서 모여 날짜를 정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 집도 벌초를 했다. 올해는 내가 벌초음식담당이다. 어제 시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어놓고 잤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음식을 만들었다. 9인분의 밥과 국을 준비했다. 예전보다 양이 많이 줄어들었다. 

준비가 거의 끝나갈 때쯤 아이들이 일어났다. 비가 많이 와서 걱정했는데 출발할 때 비가 그쳤다. 그렇게 남편과 아들을 보냈다. 


어렸을 때 아빠는 우리 세 자매를 벌초에 꼭 데려갔다. 일을 한다기보다 놀러 갔다. 남자어른들이 벌초를 하는 동안 산 위를 뛰어다녔다.  제를 올리고 남은 빵과  고기적을 먹고 집에 왔다.


엄마는 우리는 보내고 한숨 돌렸을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음식을 장만하고, 숟가락 하나까지 빠짐없이 짐을 챙겨서 보내고 난 후 조용한 집에서 단잠을 잤을지도 모른다. 지짐년들이 뭐 하러 벌초를 가냐고 구시렁대는 할머니의 소리를 들으며 방문을 조용히 닫았을 것이다. 혼자서 일 년에 12번의 제사를 치르면서도 엄마는 한 번도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가끔 고생하며 자란 어린 시절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엄마에 비하면 새발의 피가 된다. 그래서 자꾸 만족하게 된다. 이 정도면 됐지.  이거면 충분해. 스스로 기준치를 낮춘다. 기대를 하지 않게 된다. 


제주시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 제사나 시댁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뭐가 그렇게 힘든지 몰라서 진심으로 공감해주지 못한다. 


그러지 말아야지.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건 없다. 생각하려고 해도 자꾸 예전 일들이 떠오른다. 돈이 없어서 제사준비를 못 했던 엄마, 쌀을 꾸러 다녔던 엄마, 제사하려고 모아 두었던 돈을 내놓으라며 현관유리를 부쉈던 아빠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제사나 명절에 대해 말이 많다. 없어져야 할 문화라든지 간소화해야 한다는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말들이 나온다. 


제사는 돌아가신 사람을 일 년에 한 번 추모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추억들을 얘기한다.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방식대로 그날을 의미 있게 보낸다. 


명절은 끊어가는 시점이다. 여름이 지나고 곡식을 수확하게 돼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다. 햇곡식과 햇과일을 먹으며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빈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감사함을 표현한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절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시대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제사를 지내며 구시렁대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만들어갈 예정이다. 조상에게 감사할 줄 알고, 현재에 만족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찬바람이 불면 추석에 제사가 줄 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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