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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Sep 28. 2023

점점 좋아지고 있다

추석전날 막내며느리도 할 말이 있습니다.

추석준비가 끝났다. 하루종일 형님과 음식을 만들었다. 자꾸 예전얘기를 하는 건 그때보다 지금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3월에 결혼하고 처음 맞는 추석 때 나는 송편을 빚고, 메밀묵을 저었으며, 생선 18마리를 구웠다.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일만 했다. 젊고 힘이 넘쳤던 시어머니의 눈에 손이 희고 가느다란 며느리 셋은 눈엣가시였다. 일을 할 때마다 눈을 세모로 뜬 시어머니가 째려봤다.  


20년이 지났다. 어머님은 힘이 빠졌고, 세 남매를 낳은 큰 형님과 나의 목소리는 커졌다. 점심에 메밀칼국수를 시켜 먹겠다는 시어머니에게 아이들이 안 먹는다며 가볍게 샌드위치를 시키자고 했다. 어머님은 안 먹는다며 돌아섰다. 우리끼리 맛있게 먹었다.  


명절음식을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10명이 넘은 식구들의 점심을 차리는 것도 일이다.  어머님이 정정하실 때는 전을 부치다 점심상을 차렸다. 이제는 어머님이 먼저 나서서 시켜 먹자고 하신다. 호랑이도 세월을 비켜갈 수는 없다(어머님은 호랑이띠다)


10시부터 시작한 명절음식준비가 4시에 끝났다. 형님과 나는 곧바로 저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추석전날이자 시어머니의 생신이다. 해마다 명절준비와 생신상을 같이 준비했다. 가끔 추석전후로 식당에서 먹을 때도 있지만 어머님이  싫어하셨다. 우리 집에서 저녁상을 차렸다. 남편은 추석명절동안 집에 없다. 직원들이 명절을 지내는 동안 사업장을 지켜야 한다. 




 형님이 소고기미역국을 끓여 오셨다. 밥을 하고 동문시장에 내려가서 족발과 순대를 샀다. 점심에 샌드위치와 함께 주문한 샐러드를 꺼냈다. 아이들을 위해 푸라닭 두 마리를 시켰다. 케이크를 샀다.





조촐하지만 맛있는 생일상이 차려졌다. 상 두 개를 꽉 채웠다. 아이들이 할머니를 위해 생일축하노래를 불렀다. 어머님이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시어머니는 성공한 사업가다. 자신이 이룬 재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어머님 눈에 집에서 살림만 하는 며느리들이 성에 차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머님의 우선순위는 돈이다. 부모자식 간에도 돈관계가 확실하다. 큰 형님과 우스개 소리로 어머님이 우리보다 더 정정하다고 말할 때가 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85세의 어머님은 아들, 며느리들보다 머리가 더 잘 돌아간다.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하다. 항상 긴장하며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은 상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그 많은 일을 혼자 해 치우면서(어머님의 표현이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토록 모질게 살아온 생이였는데 막상 자식들에게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속이 상할까.



가늠할 수 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는 막 내 며느리기 전에 여자로서 시어머니의 삶을 존중한다.  며느리보다 손녀처럼 어머님을 대한다. 타인의 눈에는 버릇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살살 웃으며 팩폭을 날리는 내가 얄미울 수도 있다. 하지만 밑바탕에  있는 진심은 변함이 없다. 그걸 알아주든 말든 그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편리한 것들이 많은 세상이다. 돈만 있으면 뭐든 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일까? 마음은 돈이 되지 않지만 돈보다 더 많은 것을 안겨줄 때가 있다. 보름달이 유난히 밝다.



사족: 저녁설거지를 하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 차 번호를 물었다. 겁이 났다. 발신인은 자신의 차가 주차를 한 상태에서 파손이 됐는데 내 차가 맞은편에 주차되어 있어서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허둥거리며 주차장으로 갔다. 자신을 경찰이라고 밝힌 그 사람은 내 차의 블랙박스를 봐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는 블랙박스상에서는 잘 안 보여서 그러는데 칩을 빼서 컴퓨터로 봐도 되냐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너무 늦지는 않아야 한다고 했다. 남편은 집에 없었다. 아이들만 놔두고 밤에 나오면 불안했다. 아버님의 집에 왔다가 봉변을 당한 경찰이 내게 고맙다고 했다. 



 범인은 못 찾았지만 고맙다며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나는 뭘 이런 걸 다. 하면서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름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같이 간 아들에게 하늘을 보라고 했더니 저건  진정한 보름달이 아니라고 했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많은 걸 따진다고 했더니 엄마가 대충 하는 거라는 대답을 들었다.


날마다 뜨는 달인데도 이상하게 추석날 보는 보름달에는 가슴이 울렁거린다. 의미부여가 심하다. 


나는 너무 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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