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마누 Apr 16. 2023

관계를 적립하다

오래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언니, 시간 돼요?

조금. 왜?

집에 와서 김치 가져가세요.


친한 언니에게 카톡을 했더니 언니가 얼른 온다는 답이 왔다. 급하게 오느라 빈손이라며 언니는 김치통 하나를 들고 왔다. 코로나 걸리기 전에 열무김치와 배추김치를 했는데, 격리하느라 언니한테 줄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10년이 넘은 김치냉장고는 요즘 제 기능을 못하고 김치가 빨리 시어버린다.


언니는 신 김치를 싫어하는데, 어떡하나. 걱정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언니는 맛을 보더니 시어버렸다고 아깝다고 한다. 나도 아까웠다.

언니는 학원시간이 촉박하다며 김치를 담자마자 갔다. 얼마 안 있어 언니의 톡이 자꾸 울렸다.


염치없다는 말. 송구하다는 말. 곶감 빼먹듯 쏙쏙 가지고만 와서 미안하다는 말.

언니는 그런 사람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참 많이 한다. 우리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어찌나 리액션이 좋은지 언니를 위해서는 밤하늘의 별도 따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언니가 좋아하는 오징어볶음을 하고 저녁을 같이 먹었다. 역시나 최고의 찬사를 남발하는 언니. 그런 언니를 흐뭇하게 보고 나서 남편의 저녁상을 차리고 예의상 맞은편에 앉아서 밥 먹는 걸 보는데 남편이 오징어볶음에 자꾸 손이 가는 게 보였다.


오빠, 맛있어?

묵묵부답. 

언니는 오징어볶음을 제일 좋아한대. 아까 맛있다며 한 접시를 먹었어,

나도 좋아해.

어?

나도 오징어볶음 좋아한다고.

헐. 나는 결혼 19년 만에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 오징어볶음이라는 걸 알았다. 


왜 말을 안 했어?

내가  잘 먹는 게 뭐였는지  생각해 봐

아. 이 남자. 어렵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언니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술에 취해 다시는 보지 말자. 를 몇 번이나 말했었는지. 성격이 급하고 논리 정연하면서도 마음 약한 O형 수학선생님과 잘 웃고 사근사근 말하는데 은근 고집세고 자기주장 강한 B형 국어선생님이 웃으며 만났다 정색하며 헤어지곤 했다.


정치와 종교적 성향이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같은 성향 속에서 묘하게 다른 면도 있어서 나름 치열한 토론을 하거나 심각한 논제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와 관계가 이어졌던 건.


언니가 언제나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니는 내장탕을 먹다가 내가 생각났다며 포장한 내장탕을 던지고 가는 쿨함이 있다. 와인 사러 가서는 내가 전에 맛있다고 했던 걸 기억해 내고는 하나를 더 산다. 차 안에 뒹굴던 와인을 던져주고 갈 때 언니의 차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길을 걷다 예쁜 옷이 보이면 너한테 잘 어울리겠다 말을 해 주는 사람이다. 작은 관심이 마음에 크게 박힌다는 걸 언니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결혼초기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에 우울증 비슷한 게 왔었다. 계속된 유산까지 겹쳐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럴 때 언니가 자주 집에 와서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시어머니흉을 보면 그런 사람이 요즘 어디 있냐고 펄쩍 뛰었고, 남편흉을 보면 미친 거 아니냐고 더 크게 욕을 했다. 처음에는 신나게 같이 흉을 보다가 언니가 나보다 더 심하게 흥분하면 아니 꼭 그렇게 나쁜 건 아닌데.. 생각해 보면 좋은 점도 있어.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언니가 말했다.


그래도 이러저러한 건 좋지 않으냐. 너보다 더 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다 그렇게 살아가더라. 

언니는 자신이 아는 모든 케이스와 들은 얘기를 종합해 가며 말을 했고

가만히 언니의 얘기를 듣다 보면 화로 가득했던 마음이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스르르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언제나처럼 이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들. 그렇게 우리가 지낸 시간들이 이제 20년이 넘어간다.


인간관계를 적립한다. 

입금이 출금보다 많아야 하듯 좋은 일들이 나쁜 일들보다 많은 사람과의 관계는 든든하다. 좋은 추억을 쌓아놓고 있으면 가끔 안 좋은 일이 생겨도 혹은 상대가 실망스러운 행동을 해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는다. 열 번 좋았다가도 한 번 틀어지면 끝나는 거라고 하지만 열 번 좋았던 기억으로 한 번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게 된다. 그래서 좋은 기억은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좋다. 


기억은 굳이 물질적인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집에 올 때마다 뭔가를 들고 오지 않아도 된다. 그냥 지나가다 생각나서 들렸다는 말. 목소리가 안 좋던데 무슨 일 있냐는 전화 한 톡. 뜬금없이 잘 지내냐는 카톡 하나에도 좋은 감정이 적립된다. 


그렇게 열심히 부지런히 작고 소소한 기억들을 쌓다 보면 시간은 복리로 이자를 붙여준다. 

관계는 돈독해지고 상대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된다. 나의 치부가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실수를 인정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솔직하게 말을 한다. 그리고 상대가 나를 부를 때 마음을 열고 달려간다. 

서로의 관계가 적립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