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나서야 알았다. 시어머니가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결혼을 서두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도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어머님은 석 달에 한번 서울에 올라가서 일주일 동안 항암치료를 받고 오셨다.
결혼 1년 차에 어머니는 명절 합쳐서 12개 있던 제사를 세 아들에게 나눠주셨다. 세 개는 없애고 9개의 제사를 세 개씩 나눠 가졌다. 어머님은 자신이 언제 갈지 모른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식사 때마다 고봉밥을 드시고도 후식을 꼭 챙겨드신다. 어머니와 밥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되는 건 나였다. 어머님은 내가 결혼하고 들어온 날부터 아프다고 하시더니 19년째 아프다는 말씀을 하신다. 나보다 기억력이 더 좋고, 시력도 좋고 귀도 밝으시다.
아프다는 말 한 번 안 하시던 시아버지는 13년 전 겨울밤에 쓰러지시더니 6개월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다. 그때도 어머님은 같이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얼마나 슬픈 지 외로운 지 말씀하신다. 19년째 외로움을 안고 살고 있다.
친정엄마는 힘들다는 소리를 안 했다.
나만 죽으면 된다는 말만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다 정말 혼자만 죽어 버렸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말이 무거워지고 무서워졌다.
외할아버지는 59세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큰외삼촌은 외모며 성격이 외할아버지를 꼭 빼닮았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딸 셋을 낳고 큰 외삼촌을 낳았다. 아버지가 안 계신 집에서 큰외삼촌은 외할머니와 누나 둘, 여동생 두 명과 남동생 세 명을 건사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의 장남역할에 몰두했다. 첫 조카인 내게도 무척 잘해줬다. 학교에 들어갈 때마다 입학선물을 해 줬다. 대학교 때는 큰 외삼촌네 집에서 1년 정도 살았다. 큰 외숙모에게 들으니 막내 외삼촌도 2년 살았다고 한다.
작은 방 두 개 있는 집에서 아들을 키우며 자신의 그늘 아래 식구들을 품으려고 했던 큰외삼촌. 말끝마다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며 아버지 나이를 못 넘길 것 같다고 하더니 거짓말처럼 59세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추운 겨울이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생겨난다. 뻔한 결말에 빨리 끝날 것 같은데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있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이 갑자기 빵빵 터질 때도 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지? 왜 나만 갖고 그래? 억울한 마음에 울상을 지었다. 가만히 있어도 복받치는 울음에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깊은 바닷속으로 귀가 멍해질 때까지 내려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어렸을 때는 사랑이 그랬다. 남자 친구가 없을 때는 아무 일도 안 생긴다. 그러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갑자기 나도 좋아. 나도 좋아.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솟아난다. 그동안 어디 숨어있었는지 모르겠다. 일 년에 한 번씩 골고루 나타나면 좋을 텐데 한꺼번에 밀려왔다 사라졌다
나는 나쁜 사람이 되고 구질구질하게 끝났다
그래서 다시는 아무도 안 만난다고 생각하고 지내면 또 아무 일도 안 생긴다. 그러다 한 명이 생기면 또 어딘가에서 나도 나도 하며 나타난다.
가끔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고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잘하고 있으면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힘들어서 포기할 것 같으면 작은 보상으로 격려해 주는 건 아닐까?
하느님이 정말 있어서 내가 나쁜 생각을 하면 뜨거운 냄비에 손가락을 데게 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고, 딴생각에 빠져 있으면 접시를 떨어뜨리거나 쓰레기통을 넘어뜨려서 잡생각을 사라지게 하는 건 아닐까?
함께 길을 걷던 아들이 옆구리를 툭툭 친다.
왜?
턱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밤하늘에 하얀 조각구름 그 옆에 반달이 떠 있었다
예쁘다
엄마, 그런데 저 달은 반달이야?
음. 반달이 되고 있는 달?
그게 뭐야.
나도 잘 몰라.
아들은 하늘 보는 걸 좋아한다. 구름이 예쁘다. 별이 떴다. 별이 두 개다. 오늘따라 구름이 많이 있다
어렸을 때 하루종일 하늘만 쳐다보고 살았던 날 닮았다
가로등이 띄엄띄엄 있는 시골집은 9시만 되면 불이 꺼지고 깊은 밤 속에 자리 잡았다. 이른 새벽 쨍하고 차가운 날씨에 입에서 나오는 뜨거운 입김을 호호 불며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면 오리온자리가 보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별자리다.
나란히 떠 있는 세 개의 별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뭔가 안정적이다. 괜찮아. 말해주는 것도 같다
별이 보고 싶으면 별을 찾아가야 한다.
언젠가 아들과 함께 별이 쏟아지는 곳에 가고 싶다
날이 따뜻했으면 좋겠다. 가만히 누워 하늘에 있는 별을 원 없이 보고 싶다. 카메라로 기록되는 게 아니라 눈에 담고 가슴에 남기는 그런 별들을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묵직해진다.
지구는 하루종일 제 몸을 돌리면서 덩달아 태양주위를 돈다. 일탈 한번 안 하고 불평도 안 하고 힘들다는 소리 한번 안 한다. 내가 투덜대는 이 순간에도 지구가 계속 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구겨졌던 마음이 조금 펴진다. 오그라졌던 마음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오늘 하루 잘 살았다. 열심히 한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잘했다. 정말 장하다.
하늘만 보면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아 아무도 해 주지 않는 그 말이 듣고 싶어 자꾸 하늘만 쳐다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