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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Apr 21. 2023

누구에게나 있는 깊은 우물

겉웃음

결혼하고 7년 만에 어렵게 임신을 했다.  태교 겸 시간을 보내기 위해 뜨개질을 했다. 남편은  바빴다. 며칠씩 집에 안 들어오곤 했다. 나는 20분 정도 걸으면 되는 뜨개방에 거의 매일 갔다. 그곳에서 점심도 먹고 차도 마시며 하루를 보냈다. 


뱃속의 아이가 돌 때 입을 조끼를 짰고, 3살 조카의 카디건을 짰다. 내가 입을 카디건도 짰다. 실은 많았고 시간은 지루하게 흘렀다. 허리가 뻐근하게 뜨개질을 하고 나서 집에 걸어오면 잠이 잘 왔다. 


레마누씨.

뜨개방에서 얼굴을 익힌 그녀가 이름을 부르며 환하게 웃었다. 나만의 세상 속으로 그녀가 들어왔다.


영업직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기준이 있었다. 내게 이유 없이 잘해주는 사람은 대부분 영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크게 기대하지 말자.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 어려울 것도 없다. 그도 사람이고 사람은 다 똑같다. 그렇게 그녀를 대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친언니처럼 내가 배가 불러오고 아이를 낳을 동안 최선을 다했다.  아이를 낳으면 사람 마음이 보드라워진다. 잘해주는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다. 내가 이미 약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육아에 힘들어하는 내게 과자와 과일을 사다 주었고, 생일에는 남편도 안 사다 주는 케이크를 사다 줬다. 



집에 잠깐 들어오라고 해도 그녀는 쿨하게 돌아섰다. 이제 그녀를 기다리는 건 내 몫이었다. 친구도 가족도 모르는 나의 고충을 그녀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틈.

미묘하게 생기는 일상의 틈을 그녀는 기막히게 파악했다. 나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그녀에게 뭘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이런저런 보험설계서를 보여주었다. 


남편을 설득하는 건 쉬웠다. 없어지는 돈도 아니고 쓸데없이 뭘 사는 것도 아니다. 그녀를 통해 변액보험과 종신보험 그리고 아이들 보험까지 빵빵하게 들었다. 그녀는 그 후에도 우리 집 문지방을 닳고 달게 드나들었다.


남편은 감동했다. 원래 보험일이란 게 보험을 들기 전에는 알랑방구를 끼며 별의별 일도 다 들어줄 듯하다가 막상 가입란에 사인을 하는 순간 끝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여러 번 상처를 받았던 남편은 그래서일까 나만큼이나 그녀를 믿었다. 

먼저 나서서 보험을 추천해 달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7살 아들을 두고 죽었다.  부모님이 안 계셨던 그녀는 키워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많이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을 줄은 몰랐다.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2년 연속 보험왕을 했다.



나중에 들려오는 소문들은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나을 뻔한 이야기들이었다. 고객들에게 보험가입을 권유하고, 보험료를 대납해 주는 식으로 보험왕을 했으며, 자동이체대신 자신의 개인 계좌로 현금입금을 유도한 후 빼돌리다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 되었다는 말. 궁지에 몰리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 밝은 사람이었다. 웃는 게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내 이름을 부를 때 그녀의 목소리에는 한치의 어두움이 없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모든 말들을 믿을 수 없었다. 소문이 부풀어지는 뜨개방에도 가기 싫었다. 뜨개방에서  친하게 지냈던 뜨개방주인이 먼저 나서서 손님들에게 그녀의 일을 말하는 게 듣기 싫었다. 



그녀는 그렇게 매도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세속적인 이유보다 뭔가 근본적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들과 있기 싫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이 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남의 것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자신의 것을 보여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좋은 카메라로 선명하게 찍고 다시 한번 확인하고 올린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눌러주는 좋아요와 하트에 웃는다. 사진첩에 쌓이는 사진들은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난다. 추억이란 함께 나누었던 시간이 아니라 사진으로 기억된다. 



그 안에서 그녀는 좋은 옷과 가방으로 멋지게 꾸민 워킹맘이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며 항상 웃고 있었다. 말은 매끄럽고 글은 다정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그녀에게 들었던 변액보험이 15년 만기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람이 죽어도 살아도 시간은 흐르고 사연이 있든 말든 기록은 연연하지 않고 수치로 기록된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네 보험료는 그나마 자동이체라서 다행이었다고 한다.


나는 다만 그녀의 웃음을 떠올리며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얼마나 깊고 깊은 것일까. 얼마나 검고 어둡기에 그 많은 고통과 아픔을 꼭꼭 숨긴 채 환하게 웃을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그녀가 무섭고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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