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답을 찾습니다
해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을 구입해서 읽고 책장에 꽂아놓는 걸 좋아했다. 신춘문예의 참신한 글도 좋지만 이상문학상 수장작에서 만나는 기성 작가들의 농도 짙은 소설을 좋아한다. 나는 제주도에 있고, 소설가들을 만날 기회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인터넷을 기웃거리거나 서점에 가서 책을 사 보는 것뿐이다. 이상문학상이 다른 의미로 떠들썩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부터 읽지 않았다.
요즘 단편소설을 쓰고 있는데 자꾸 막힌다. 막힌다기보다 내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학교 도서관 봉사를 가서 책장에 묻은 먼지들을 닦고 있는데 이 책이 보였다.
김경욱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나는 맘에 드는 작가를 만나면 그의 책을 계속 구입해서 읽는 습관이 있다. 소설 한 편만 읽고는 그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집 책장에는 김경욱의 소설집이 6권 있다.
소설 쓰기에 대한 마음이 통했을까? <천국의 문>은 마침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의 주제와도 통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우수상 수상작인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은 소설가는 무엇을 쓰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치 네 고민을 말해봐. 내가 다 들어줄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소설을 쓰면서 막막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책을 읽으며 조금씩 풀려가는 기분이었다. 옮겨 적을 게 너무 많았다.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첫 문장에 신경 쓰라는 것이다. 김경욱 작가 역시 한 단편에서 화자의 입을 통해 "글을 쓸 때는 첫 문장만 수백 번 고쳐 써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적어봤다. <2016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에 수록된 소설들의 첫 문장을.
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기별을 들었을 때 여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화장을 고치는 것이었다. 김경욱의 <천국의 문>
무엇 때문인지 사람들은 나를 일본 사람으로 착각하곤 한다. :김경욱의 <양들의 역사>
새 아파트에서 마지막으로 주문한 물건은 와인잔이었다. 김이설의 <빈집>
치숙은 쓰는 사람이었다.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
가끔씩 반복되는 악몽을 꾼다.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
그가 여객선 사고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문경새재에서였다. 정찬의 <등불>
아무도......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황정은의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소설의 내용이 모두 다르듯 첫 문장도 다양하게 시작했다. 그런데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첫 문장만 읽어도 궁금증이 생긴다는 것이다. <천국의 문>에서는 무려 4가지의 질문이 나온다. 기별을 전한 자는 누구인가? 아버지의 죽음은 여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여자는 왜 화장을 고쳤을까? 여자와 아버지의 관계는?
<천국의 문>은 이 4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좋은 소설이란 독자를 궁금하게 만든다. 인간은 궁금한 걸 못 참는다. 오죽하면 "궁금하면 오백 원?"이라는 말까지 할까. 모든 사건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미지의 세계, 속을 내보이지 않는 인물처럼 흥미로운 게 있을까? 소설이 주는 재미는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7편의 소설 속 첫 문장 들은 약속한 것처럼 궁금증을 자아냈다.
<천국의 문>을 읽고 나서 최근에 내가 쓴 소설을 읽었다. 처음 쓴 문장은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제일 많이 운 사람은 큰 이모였다."이다. 소설을 완성하고 나서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 고쳐 쓴 소설의 첫 문장은 "사람의 얼굴이 다 다르듯 그들의 죽음도 제각각이다." 다.
처음 쓴 문장으로 시작한 글은 큰 이모와 엄마와의 관계 혹은 엄마의 죽음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 된다. 두 번째 쓴 문장으로 시작한 소설은 조금 더 보편적인 죽음을 다룰 수 있다. 역량이 된다면.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설을 썼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뼈대를 놔두고 다시 쓰고 있다. 글이 막히는 이유를 알았다. 나는 두 번째 소설을 쓸 능력이 되지 않았다. 내가 쓸 수 있는 걸 쓰려고 하지 않았다. 주제가 막연하고 너무 컸다. 그래서 쓰지 못했다.
소설은 굴파기다. 화두를 쥐고 답을 찾아 파고 파고 또 파 들어가는 일이지. 나는 30년을 넘게 팠는데 넌 겨우 10년 남짓 굴을 파는가 싶더니 어느새 애드벌룬이나 띄우는 궁리를 하더구나. 쓰기 시작하면 책상이 사라진다는 말도 못 들었어? 넌 책상에만 집착하는 꼴이야. 중요한 건 진짜를 쓰는 거다.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 中
한 달 정도 아이들이 아팠다. 세 남매가 돌아가며 A 형 독감에 걸렸다. 다 나아서 학교에 갔는데 이번에는 내가 독감에 걸렸다. 일주일이 지나갔다. 겨우 일상으로 돌아왔나 했더니 아들이 다시 B형 독감에 걸렸다.
무릎이 꺾였다. 막둥이는 한 달 내내 기침을 하고 있다. 나도 계속 기침을 한다. 아프면 운동할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일부러 삼시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목이 까끌거리고 침을 삼킬 때마다 아팠지만 물에 밥을 말아서라도 먹었다. 내가 먹고 힘을 내야 아이들을 건사할 수 있다. 그렇게 버텼다. 그러는 사이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벌써 12월의 중순이다.
어제 오랜만에 아이들과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냈다. "엄마,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벌써 12월이야." 9살 막둥이도 그렇게 느끼는데 나는 오죽할까. 마음은 조급하고 일은 자꾸 생기고, 그 와중에 하고 싶은 건 많은 요즘이다. 정신줄 꽉 잡고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