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
고약한 꿈을 꾸었다. 어제 본 재난영화 때문일 것이다.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졌다. 아이들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큰아이가 울면서 동생들 손을 놓쳤다고 말했다. 나는 큰아이를 안고 펑펑 울었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꿈을 꾸었다. 막둥이가 갑자기 사라져서 정신없이 찾아다니는 꿈이었다.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나면 온몸에 힘이 빠진다. 멍한 상태로 주위를 둘러본다. 양 옆에서 아이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막둥이가 기침을 한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걸린다.
11월 중순즈음 큰아이가 A형 독감에 걸렸다. 중학교에 독감이 유행이었다. 같은 반에서 반이나 결석을 했다. 중학교 첫 현장학습도 독감 때문에 가지 못했다. 방에서 격리를 잘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4학년 아들이, 이틀이 지나 9살 막둥이가 A형 독감에 걸렸다.
큰딸은 열은 나지 않고, 머리만 아프다고 했다. 아들은 종아리가 뜨겁다고 했다. 막둥이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2주를 돌아가며 아팠다. 타미플루 5일 치를 먹고 학교에 보내고 나니 이번에는 내가 아팠다. 몸살이 심했다. 아이들을 보내고 누워서 지냈다. 누워 있다 학교 끝날 시간에 맞춰 데려와 저녁을 해 주고 또 누웠다. 운동도, 책도 아무것도 못한 채 11월을 보냈다.
병원에 가지 않고 2주를 버텼더니 몸이 조금 나아졌다. 미뤘던 글을 쓰면서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12월 초 아들이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이마를 짚어보니 뜨거웠다. 느낌이 싸했다. 서둘러 병원에 데려갔는데 B형 독감이었다. 수액을 맞추고 집에 왔다.
아들은 축제에 참석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수액을 맞으면 3일 만에 갈 수 있다고 달랬다. 아들은 축제에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겨우 한시름 돌렸다. 그리고 이번 주 월요일 막둥이가 열이 올랐다. B형 독감이었다.
이로써 우리 집 아이들은 한 달 사이에 A형 독감과 B형 독감에 걸렸다. 큰아이는 담주부터 기말고사 기간이다.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해마다 독감예방접종을 온 가족이 했다. 올해만 진짜 딱 올해만 접종할 시기를 놓쳤다. 행사가 겹쳐서 그것만 끝나면 접종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새를 못 기다리고 독감을 연달아 걸렸다. 엄마노릇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속상했다.
건강할 때는 별 의미 없이 보냈던 하루가 아프고 나니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내가 운동을 하는 것도 아프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프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건강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올 겨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보왕삼매론 제 1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하셨느니라.
편안하고 좋은 것만 바라지 말고, 몸의 병과 세상살이의 곤란과 마음의 장애를 받아들이되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어떻게 쓰일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과속방지턱 앞에서 속도를 줄이듯이 천천히 가라는 경고를 받았다. 자만하지 말고, 둘러보며 살라고,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며 살라는 말인 것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