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
김장을 했다. 혼자 하는 거라 욕심부리지 않고 14포씩 두 번에 나눠했다. 일 년에 한 번 김치냉장고를 정리한다. 먹다 남은 신김치들을 위로 꺼내고, 이번에 새로 한 김치들을 밑에 넣었다. 해가 바뀌면 학년이 올라가듯 김치통들도 정리를 해야 한다. 겨울에 읽을 책들도 10권 정도 구입했다. 방학하면 아이들과 도서관에 다닐 예정이지만, 대출해서 읽는 책과 직접 구입한 책을 읽는 재미는 엄연히 다르다. 읽을 책을 오른쪽에 쌓아놓고 다 읽으면 왼쪽으로 놓는다. 좌우가 바뀌는 날은 기분이 좋다. 마트에서 세일하는 쌀도 10킬로씩 두 개를 샀다. 나는 옛날 사람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쌀이 떨어지면 불안하다. 항상 여유 있게 쌀독을 채워 놓는다.
오늘 김치냉장고를 정리하고, 쌀독에 쌀을 채우자 부자가 된 것처럼 마음이 빵빵해졌다. 그래서 인스타에 나는 부자다. 김치부자.라고 올렸더니 하트가 쏟아졌다. 꼭 돈이 많아야 부자일까? 내 힘으로 만들어낸 세상 속에서 먹을 것 많고 내 집에서 오손도손하는 아이들과 있으면 그게 부자 아닌가.
오늘까지 해서 조정래의 장편소설 <황금종이>를 다 읽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조정래의 소설 <허수아비춤>과 연결이 되는 소설이었다. 물질만능주의를 지나 황금만능주의 시대를 여실하게 그려낸 작가의 필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그렇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읽을수록 입이 씁쓸해졌다. <황금종이>는 한마디로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에피소드 14편을 나열한 소설이다. 사회면이나 네이버기사에서 접할 것 같은 사건사고들이 14번이나 나온다.
돈 때문에 부모자식 간에 싸우고, 죽이고, 형제도 친구도 없는 몰인정한 세계를 헤매다 보면 아무리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해도 정말 이런 세상 속에 내가 살고 있나 싶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제주도에도 갑자기 오른 땅값 때문에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문득 '나는 정말 부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부자가 부러웠던 건 그들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쥐들이 운동회를 하는 슬레이트집보다는 아파트가 편안할 것 같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후레시를 찾다가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걸 보면 눈이 휘둥그레졌다. 좋은 곳에 살면 마음도 더 풀어지고 그래서 싸울 일도 없을 것 같아서 부자가 부러웠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돈이 많으면 그만큼 골치 아플 일이 생긴다. 돈은 돈을 부르기도 하지만, 돈만 좇는 사람들에게 돈귀신이 되어 달라붙기도 한다. 돈밖에 모르는 돈귀신을 누가 부러워할까? 소설 <황금종이>에 나오는 인물들은 돈은 많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누구보다 돈을 원했지만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파국으로 치닫는 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책을 덮고 눈을 들어 보니 오전에 쌓아두었던 김치통이 보였다. 문득 나는 소설 속 인물들처럼 몇십억, 백백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 김치찌개에 김치를 아끼지 않고 넣을 수 있다. 먹고 싶을 걸 다 먹을 순 없지만, 삼시 세 끼를 못 먹는 건 아니다. 꾹 참았다가 먹으면 더 맛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부자다.
크리스마스이브다. 아이들은 비가 오면 산타가 어떻게 올 것인가를 두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중학생 딸은 그런 동생들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4학년 아들은 반신반의하고, 9살 막둥이만 신났다. 이미 산타한테 받고 싶은 선물을 적어서 트리에 걸어놨으니 아무 걱정 없다고 했다. 맞다. 우리 집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도 있다. 와~나는 진짜 부자였다.
내일 아침이면 아이들은 선물보따리를 풀며 산타의 존재를 확인할 것이다. 나와 남편은 비록 선물을 사는데 예상보다 많은 지출을 했지만 아이들의 웃음이면 된다는 마음으로 뿌듯하게 쳐다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된다.
메리 크리스마스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