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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아저씨

지극히 개인적인 글입니다.

by 레마누

친구와 오랜만에 맛있는 점심을 먹고 있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에서 한껏 고무된 우리는 음식이 나올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건 남이 구워주는 고기다. 입에서 살살 녹는 소고기에 심취한 채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카톡이 왔다.


친한 언니였다. "이선균 너무 슬프다야."


뜬금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하는 사이 언니가 다시 톡을 보냈고,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시간이 한순간 멈췄다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과는 다른 마음이 들어왔다. 조금 슬펐고, 답답했다.


나는 그 사람을 잘 모른다. 그렇지만 배우로서 그를 좋아했다. 그의 연기는 편안했고, 때론 위로가 됐다. 마음이 힘들 때 본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내 최애 드라마다. 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드라마 속에서 그의 행복을 빌었다.


저녁거리를 사러 갔다 소주 한 병을 사고 왔다. 이미 가버린 그에게 술 한잔 올리고 싶었다. 사람은 돈이 없어도 죽지만 명예가 떨어져도 죽는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고, 다시 살아가도 될 텐데.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면 그 손가락이 언젠가는 내게 올 수도 있다. 독한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겪어도 눈하나 깜짝 않고 잘만 살던데 그렇게 질기게 살 수는 없었는지. 마음이 좋지 않다. 오래전 <나의 아저씨>를 보고 난 후 올린 포스팅을 다시 찾아봤다. 안녕, 나의 아저씨.



드라마 <나의 아저씨 8회>


박동훈은 애써 외면했던 것들의 진실을 알게 되고, 괴로워한다.


혼자 동네에서 맥주를 마시는 박동훈.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려온 이지안,


함께 술집에서 나와 오래된 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걷는다.





동훈 :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거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하는 거야.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지안 :인생의 내력이 뭔데요?


걸음을 멈추고 쳐다본다.


동훈 : 몰라.


지안 : 나보고 내력이 세 보인다면서요.


다시 앞을 보며 걷는다.


동훈 : 내 친구 중에 정말 똑똑한 놈이 있었는데, 이 동네에서 정말 큰 인물 하나 나오겠다 싶었거든. 근데 그놈이 대학 졸업하고 얼마 안 있다가 뜬금없이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 버렸어. 그때 걔네 부모님 앓아누우시고, 동네 전체가 충격이었는데 걔가 떠나면서 한 말이 있어, 아무것도 갖지 않은 인간이 돼 보겠다고.


다들 평생을 뭘 가져보겠다고 고생고생하면서 나는 어떤 인간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데 뭘 갖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원하는 걸 가졌다고 해도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금이 가기 시작하면....... 못 견뎌. 무너지고.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나를 지탱하는 기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것 같고, 그냥 다 아닌 것 같다고.


무의식 중에 그놈 말에 동의하고 있었나 보지. 그래서 이런저런 스펙 줄줄이 나열돼 있는 이력서보다 달리기 하나 쓰여 있는 이력서가 훨씬 세 보였나 보지 뭐.


지안 : 겨울이 싫어.


동훈 : 좀 있으면 봄이야.


지안 : 봄도 싫어.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싫어요.


. 짧은 인사를 하고 돌아서 걷던 이지안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지안 : 파이팅.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 거 같기고 하고, 박동훈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한 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듯. 수줍게 작게 말을 했다. 바닥만 쳐다보던 그 작은 아이가 처음으로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항상 긴장되었던 얼굴이 조금 풀린 것 같다.




항상 궁금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오로지 나 혼자만이 되었을 때 나는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집, 가족, 사람들, 내가 나라고 믿는 것들이 과연 진짜 나일까? 인간이 가진 내력은 과연 무엇일까?

나의 내력은 강한가? 약한가? 외면하며 살았지만 항상 궁금했던 것들을 차근차근 말해주는 이 드라마가 참 좋다,


예스 24의 장바구니에는 몇 달째 <나의 아저씨> 대본집이 들어 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말고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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