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여왕

버티는 힘

by 레마누

글을 쓸 때 착각하는 순간들이 있다


깊은 밤 가끔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집 안에 깨어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그때 글을 쓰면 작품이 된다.



약간의 술을 마실 때도 있다. 그러면 글은 좀 더 윤기가 나고 술술 나온다. 내가 글을 쓰는 건지 글이 저절로 나오는 건지 모른다. 손가락이 흘러나오는 글을 잡지 못하고 허둥댄다. 하얀 모니터 가득 글이 채워진다.


몸을 뒤로 젖히고 손깍지를 껴서 팔을 쭉 뻗는다. 목을 좌우로 가볍게 흔든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하루키가 된다. 더 이상의 글을 쓸 수 없다. 이 글이 최고다. 하는 마음으로 모니터를 끄고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노트북을 켜면 제목부터 낯간지러운 폴더. 더블클릭을 하는 순간 글들이 쏟아지는데 그건 글이 아니라 술주정이었다. 대상은 불분명하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는 글들.


한껏 멋을 내고 진한 화장을 한 채 어른 흉내를 내는 사춘기소녀 같은 어색함과 서투름. 착각의 늪이라는 걸 알면서 빠져들고 매번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친다


밤에 쓰는 글이 감성적이고 추상적이라면 낮에 쓰는 글은 좀 더 이성적이다. 방금 멋진 책을 읽고 나서 쓰는 글은 인용과 어디서 읽은 듯한 문장으로 채워진다. 그럴듯한 문장들이 연이어 나온다. 이 정도면 나도 꽤나 글을 잘 쓰는 것 같다고 착각하는 순간. 인용문장이 끝난다. 이제 나만의 글을 써야 한다.



하지만 엄마 구두를 신고 또각거리는 소리에 취했던 일곱 살이 얼마 못 가 넘어지듯이 절망의 시간은 빨리 찾아온다.



책 속의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나는 열심히 달리다 낭떠러지에 다다른 것처럼 당황스럽다. 멋지게 다리를 놓고 절벽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그럴 역량이 없다. 뛰어넘을 용기도 없다. 급하게 글을 마무리 짓고 끝내 버린다. 허물을 들킬 까 안절부절못한다.

그게 글에 다 보인다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필사를 하게 된다. 책 한 권을 모두 받아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썼을까. 감탄하며 문장을 옮겨 쓴다. 그 문장을 쓸 때는 마치 내가 쓴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이 그런 글이라는 착각. 그 모든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나만의 글이 완성될 것이라 믿으며 나는 오늘도 착각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오랜만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를 읽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작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인물과 상황 묘사를 잘한다. <깊이에의 강요>의 수록작품인 <승부>는 그야말로 심리와 인물묘사의 진수를 보여준다. 소설 통째로 옮겨 쓰며 조금이나마 글을 쓰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사족: 착각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 나이를 먹을수록 나아지고 있다는 착각 (스노앱으로 찍고 사진을 보정하고 이게 나라고 생각한다)

◆ 작년보다 올해가 더 멋있고, 내년에는 더욱더 잘 될 거라는 착각

◆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착각

◆ 성과는 아무것도 없지만 내가 가는 길이 맞다는 착각

◆ 우리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는 착각


그 착각들이 기둥이 되어 쓰러지고 싶은 마음을 지탱해주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렇게 살기로 하자 그렇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