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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Dec 22. 2023

제주의 겨울

두렁청한 날씨가 계속됩니다

유튜브에서 들은 얘기다. 패널들이 자신이 겪었던 가장 강력한 추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철원에서 군생활을 했다는 말을 시작으로 강원도의 추위에 대해 저마다의 경험을 풀고 있었다. 그때 진해에서 해군훈련을 받았다는 패널이 상상도 못 할 추위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자 동석한 사람들 모두 진해요? 경상남도 진해가 춥다고요? 하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군출신의 그 패널을 끝까지 진해의 칼바람이 얼마나 매서운가를 말했다. 

 

나는 그 방송을 들으면서 진해도 철원도 가 보지 못했지만 어떤 느낌으로 말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제주도는 흔히 우리나라의 최남단이라고 불리며 따뜻한 남쪽 지방의 상징으로 통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주도가 추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라산에 눈이 온다는 것은 알지만 제주시내에도 눈이 오는 걸 잘 모른다.


제주도가 따뜻한 건 사실이다.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낮기온이 17도에서 20도였다. 간간히 반팔을 입은 사람이 보이기도 했다. 제주시는 그나마 추운 편이다. 서귀포는 정말 따뜻하다. 그러다 갑자기 날씨가 돌변한다. 제주도 사투리로 '두렁청한'날씨가 된다.


밤새 눈이 내린 날 아침은 고요하다. 차소리 하나 없다. 문을 열면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이 펼쳐진다. 발이 푹푹 빠지게 눈이 왔다. 그렇게 가끔 폭설이 내린다. 


제주의 바람은 또 어찌나 사나운지 모른다.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찬바람이 살을 파고든다. 나처럼 수족냉증이 있는 사람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끊어질 것 같다.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양 볼이 빨갛게 변한다.


친정아빠와 남편과 남동생이 모두 철원에서 군복무를 했다. 그래서인지 경험담이 비슷했다. 콧물이 얼어버리는 추위, 무릎까지 파묻히는 눈과 오줌을 싸다 말고 얼려버린다는 말은 들어도 들어도 신기하다. 제주도는 그런 추위가 아니다. 기온으로만 보면 제주도는 기온이 많이 떨어지지 않는다. 


바람. 제주는 바람이 문제다. 바람이 정신없이 몰아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제주에 온 사람들이 제일 적응하기 힘든 것도 바람이다.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이 동서남북으로 휘몰아친다.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바람이 불 때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면 걷는다. 모진 바람을 묵묵히 견뎌낸 사람만이 갖는 단단함이 있다.



어제오늘 제주도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기온이 내려갔고, 바람이 불었다. 오늘 아침 제주시의 학교는 재량껏 등교시간을 늦추거나 결석을 인정해 줬다. 큰 딸은 9시까지 등교하라는 문자를 받았지만 버스를 타고 오히려 일찍 학교에 갔다. 나는 초등학생아이들은 학교에 안 갔으면 했다. 운전은 도무지 안 될 것 같고, 학교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왔다. 집에서 뒹굴거리자고 아이들을 설득했다.




아이들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걸어서라도 학교에 간다는 것이다. 학교에 가지 말라는 엄마와 학교에 가겠다는 아이들이 대치하느라 9시가 넘었고 결국 나는 아이들과 함께 버스를 탔다. 



집에 있는데 같은 반 엄마가 사진을 보내왔다. 빨개진 얼굴로 친구들과 사진을 찍은 아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신발이 젖든 말든 손이 시리으면 호호 불면서 두 볼이 빨개져도 마냥 좋은 아이들. 



엄마들의 걱정과는 달리 너무도 재미있게 눈 오는 날을 즐기는 아이들을 보자 마음이 이상했다. 나도 어렸을 때는 추운 것도 모르고 마냥 노느라 바빴는데, 요즘은 하지 말라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재미없는 엄마가 됐다. 조금 추워도 되는데 정작 그걸 못 견디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엄마였다. 



엄마들은 힘들고, 아이들은 즐거운 이틀이었다. 가끔 정신 바짝 차리라고 이런 이벤트가 생긴다. 그러면 신발장에서 잠자던 부츠를 꺼내고, 장갑과 모자로 중무장하고 신나게 밖으로 나가 뒹군다. 



작년에는 커다란 수박만 한 눈덩이를 들고 집까지 15분을 걸어오기도 했다. 아이들의 겨울은 눈만 있으면 된다. 막둥이가 오늘은 정말 신나는 날이었다며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또 추억하나를 만들었다. 막둥이가 오늘을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다. 



*두렁청하다 : ‘어리둥절하다’의 제주도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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