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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추억이 되는 순간

오정희 장편소설 <새>를 읽고 나서

by 레마누

엄마가 집을 나가면 아빠는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매번 "이놈의 지집년들"이라고 욕하던 할머니도 아무 말없이 밥상을 차렸고, 할아버지는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연기가 나지 않는 담배를 피워댔다. 나는 작고 어두운 할머니방에서 이불을 쓰고 잠이 들었다.


아빠는 언제나 엄마와 함께 돌아왔다. 둘은 맛있는 것도 먹고, 사진도 찍고 왔다. 새 옷을 입고 들어올 때도 있었다.


나는 매일 학교에 가면서 엄마가 집에 있기를 빌었다. 엄마말을 안 들으면 나 때문에 집을 나가면 안 되니까 엄마가 하라는 것만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나도 안 했다.


시간이 지나 거미처럼 말라가는 엄마를 보면서 차라리 엄마가 집을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밥도 혼자 잘 챙겨 먹고 동생들도 알아서 옷도 잘 입고 있으니 술 마시면 괴물이 되는 아빠한테서 엄마가 도망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거센 아빠의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그저 견디고 있었다. 나보다 작은 엄마가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아빠에게 매를 맞아본 적이 없다




책을 읽다 보면 문득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되기도 하고 부풀어져 그게 맞는 건지 모를 때도 있다. 하지만 각인된 어느 한순간 그 장면만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성난 야수 같았던 아빠와 퉁퉁 부은 눈으로 곤로에 불을 붙이며 눈이 맵다고 했던 엄마. 엄마가 울다 지쳐 집을 나갈 까 두려워 매일 엄마, 엄마를 불렀던 내가 뇌리에 박혀 있다.



어른이 되면 슬프지 않을 줄 알았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정작 그때 엄마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은 지금은 슬픈 걸 숨기기 위해 웃는 사람이 됐다.


엄마가 밥보다 요구르트를 더 많이 먹었던 건 속이 답답해서였다. 주먹으로 아프리 쳐도 내려가지 않는 게 가슴에 딱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제 맘을 저도 몰라서, 알면서도 어쩔 줄 몰라서. 그래서 엄마는 바짝바짝 말라갔나 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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