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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Feb 18. 2024

나도 한때는

푸념

낮은 조명, 테이블마다 놓여 있는 유리화병에 예쁜 꽃들(생화가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잔잔한 음악, 상대에게 몸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얼마 만에 보는 모습인지 모른다. 남편과 데이트할 때는 종종 저녁에 레스토랑에 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연애할 때마다 레스토랑 데이트를 즐겼다. 생일이나 밸런타인데이, 크리스마스, 만난 지 백일 째 되는 날, 잘 차려입고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가는 식당은 주차하기 쉬운 곳, 아이들이 잘 먹는 곳으로 한정되기 시작했다. 친구들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고깃집, 족발집, 아귀찜 등등 푸짐하고 맛있지만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만났다. 코트보다는 잠바가, 원피스보다는 조거팬츠가 구두보다는 운동화가 어울리는 곳들이었다.


어제 오래된 친구들과 모임을 했다. 내가 추천한 레스토랑이었다. 낮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음식이 맛있고, 직원들이 친절해서 기억에 남은 곳이었다. 밤에 오면 좋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마침 친구들이 장소를 고민하길래 슬그머니 링크를 올렸다.


테이스트 인. 베라체근처 파스타맛집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했다. 예약석으로 안내를 받았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낮보다 밤이 훨씬 예뻤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제일 안쪽에 앉아 있던 내 앞에 남녀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사선 방향에 또 다른 남녀가 식사 중이었다. 그 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음악은 잔잔했고, 직원들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때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두 테이블에서 소개팅을 하고 있는 소리가. 서로의 취미를 물어보고, 소개해 준 사람과 어떤 관계인지를 말하고, 운동을 그만둔 이유와 제주에 사는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조심스러운 대화가 양쪽에서 오갔다. 듣지 말아야지 하며 핸드폰을 켰는데, 또 계속 들린다.


저쪽 테이블 남자가 헬스와 축구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맞은편 여자가 멋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내 앞 테이블 남자가 자기도 예전에 헬스를 했는데 힘들어서 그만뒀다고 하자 여자가 네. 하고 대답하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저쪽 테이블은 여자가 남자에게 몸을 잔뜩 기울여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남자가 하는 말마다 멋있다. 정말요? 대단하네요. 리액션이 좋았다. 이쪽 테이블에서는 남자가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여자가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바람에 대화가 자꾸 끊겼다. 남자가 어떤 식으로든 여자의 흥미를 돋아야 했다. 나는 남자가 말을 뱉을 때마다 헛발질을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하며 현실로 돌아왔다.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설렘이라는 단어를. 나도 분명 남편과 저럴 때가 있었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빵빵 터졌던 때, 남편은 있는 말 없는 말을 하며 어떻게든 나를 불러내고, 나는 아닌 척 못 이기는 척했던 그때. 데이트할 때는 조금만 먹고 집에 오자마자 비빔밥을 비벼 먹었는데. 그때의 나와 남편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너무 익숙해져서 남편인지 오빠인지 아들인지 모르는 뚱뚱한 중년남자를 예전에는 정말 사랑했었다. 언젠가 아이들이 왜 엄마는 과거형으로 말하냐고 물었다. 지금은? 사랑이라는 말을 하기엔 왠지 쑥쓰럽고 어색하다. 나는 매일 남편의 얼굴을 보며 사랑해라고 하지만 그건 밥 먹어와 같은 의미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행복하고 좋아죽어야 하는데 없다.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 앞에서 남편을 안으며 일부러 사랑해라는 말을 한다. 아주 형식적으로 한다. 부부사이에 조심성은 사라지고 편안함이 들어가며 우리는 서로를 존경하기로 했던 처음 마음마저 잃어버린 건 아닐까?


얼마 안 있어  친구들이 왔고, 나는  아줌마로 돌아와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우리들만의 이야기를 하는 사이 테이블의 남녀는 일어섰다. 소개팅의 끝이 너무 궁금했지만 알 길은 없다. 그들에게도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는 술안주가 되는 날이 오겠지.  알 수 없는 그들의 행복한 결말을 기원한다.


다 그렇게 사는 거 맞나요?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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