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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이 죽 끓듯

그 또한 나인걸

by 레마누

화요일에 제주에 도착하고 짐을 풀었다. 수요일 11시에 엄마들 모임이 있었다. 내가 주도해서 만든 모임이지만 지금은 저절로 굴러가서 벌써 8년째다. 의리로 나가고 있다. 여행핑계로 불참할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 보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수요일 저녁에 남편에게 내일 조조할인으로 영화 '파묘'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아침방과 전 수업이 있어서 아이들을 7시 40분에 학교에 데려다주고 8시까지 집에 와서 챙기고 나가면 되겠지. 싶었다. 아침밥을 꼭 챙겨 먹는 남편을 위해 간단하게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고 외출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봤자 세수하고 선크림을 바르는 정도지만 오랜만의 영화관 나들이라 은근히 설레기도 했다.



남편이 준비하는 사이 원두를 내려서 텀블러에 담고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차에 올라탄 시각이 9시 25분. 9시 50분 영화시작시간에 딱 맞추겠다고 생각하며 네이버검색으로 마지막 확인을 했는데.


이런

9시 30분 시작이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9시 30분은 변하지 않았다. 난 왜 내 마음대로 9시 50분이라고 생각했을까? 기운이 쑥 빠지면서 입이 이만큼 나왔다. 남편에게 영화관에 안 가도 된다고. 당신이 주민센터에 볼일이 있다고 하니 그것만 하고 오늘 일정은 끝이라고 했다. 시무룩한 날 보더니 남편은 다른 영화관을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이미 글렀다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빠, 오늘은 어차피 영화를 못 봐. 그냥 가세요."


남편과 주민센터에 가서 농어민수당을 신청했다. 나올 때 시간을 봤더니 9시 40분이었다. 남편은 다른 영확관이라도 알아보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네이버를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일반석 9시 30분 아래 아래에 컴포트 10시 좌석이 있었다. 남편에게 말했더니 그걸 보자고 했다. 불과 10분 전까지 힘이 빠져서 말할 기운이 없었던 나는 물 맞은 나무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10시 정각에 도착해서 표를 받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컴포트 극장이 뭔지 몰랐던 나는 불 꺼진 극장 안에서 버튼을 찾느라 바빴다. 겨우 찾아서 발과 허리에 맞추고 나니 영화가 시작됐다.



영화가 끝나고 점심을 먹었다. 남편에게 최고의 날이라고 말했더니 아까까지 죽을 상을 지었던 사람 어디 갔냐며 놀려댄다. 그러게. 그 사람은 어디 갔을까? 나는 불과 십 분 사이로 울다가 웃고, 속상했다가 기분이 좋아지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오늘 같은 일이 생길 때마다 새삼 느낀다. 내 마음은 끓는 팥죽보다 요란하다는 것을.



새옹지마는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생기면 좋은 일도 따라온다는 말로 내가 좋아하는 4자 성어다.


어렸을 때 나는 너무 좋아라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이었다.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너무 좋고 진짜 좋고, 정말 좋았다.


살다 보니 점점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일들이 생겼다. 너무 좋아하다 보면 궂은일이 따라오고, 나만 좋아했던 사람이 내 마음과 다르다는 걸 알고 상처받고 아팠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자꾸 몸을 움츠리게 된다. 겁이 나서 선뜻 나서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호기심에 뜨거운 그릇을 만지다 화들짝 놀랐던 기억을 갖고 어른이 되면 눈앞에 있는 것들과 거리를 두게 된다. 좋아봤자 그게 그거지. 하면서 좋은 것을 좋다고 말 못 하는 바보 등신이 된다. 반면 나쁜 것, 슬픈 것에는 여전히 민감해서 여전히 상처받고 아파하지만 아닌 척하느라 얼굴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씁쓸한 웃음. 슬픈 미소를 짓게 댄다. 나도 모르게.


정말 그럴까? 내가 아는 게 정말 그런 걸까? 아니면 그럴 거라 지레 짐작하고 사는 건 아닐까?


요 며칠 마음이 요동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참 요란하게 오두방정을 떨더니만 다 가라앉았나 보다. 조용히 앉아 글을 쓰고 앉아 있는 걸 보니.



내 마음이라도 나는 주인이 아니다. 마음도 몸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인데 이도 아닌 것 같고 저도 아닌 것 같다. 변덕이 죽을 쑤는 가운데 가만히 웃고 있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



나에게서 나와 저만치 떨어져 있다. 그것도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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