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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그리고 노력

아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by 레마누
https://blog.naver.com/ksh100486/222841251870


CSI는 2000년부터 2016년까지 방영한 과학 수사 드라마다. 과학수사대를 배경으로 하는 제리 브룩하이머 사단에서 제작하였다. 라스베이거스 시리즈의 길 그리썸과 마이애미의 호라시오, 뉴욕의 닉반장을 두고 친한 친구와 누가 더 멋있냐며 설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CSI이후 한동안 미국의 범죄드라마에 빠져 살았다.


CSI요원들은 범죄가 일어난 현장을 수사하는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시체와 현장에 남겨진 증거들을 통해 범인을 찾는다. 요원들은 집중력과 집요함, 그리고 모든 것을 연결시킬 수 있는 방대한 지식과 인간의 심리파악까지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시청자들을 잡고 흔드는 신공을 보였다.


매해 에피소드들을 보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CSI라스베이거스'의 한 에피소드다. 길 그리썸과 사귀던 세라가 일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그리썸이 이유를 물었다. 그때 세라가 했던 대답이다.(사실 이건 정확하지 않다. 오래전에 본 거나 내 기억에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대로 쓸 뿐이다.)


세라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집에서 증거물을 찾는 도중 회의를 느낀다. 방금 식사를 마친 듯 어지러운 식탁과 소파에 가득한 옷들. 아마 주인은 나갔다 와서 치워야지 생각하고 급하게 집을 떠났을 것이다. 그렇게 나간 사람이 들어오지 못했다. 주인이 들어와서 치워야 하는데, 그래서 집은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었는데,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들추고, 꺼내고 열어본다.



그 후 세라는 자신의 집을 나설 때마다 반드시 집청소를 깨끗하게 한다고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주변을 깨끗이 하고 밖을 나섰다. 매번.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집이 당황하지 않게. 그리고 세라는 지쳤다고 말한다.


그때부터였다. 여행이나 가벼운 일박을 해도, 혹은 모임을 가기 전에라도 집을 청소하기 시작한 게.


사고란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기 시작했다. 모든 불행은 나를 비켜가지 않는다. 나는 예외가 아니다. 나는 집을 나가기 일주일 전부터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지난주 2박 3일의 짧은 여행을 앞두고도 예외는 없었다. 냉장고 정리와 물부엌 청소부터 시작해서 장롱정리까지 매일 청소만 했다. 청소하다 지치면 만약에 시어머니나 큰 형님이 우리 집에 나 없이 들어왔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에이. 하면서 다시 치우게 된다.


어떻게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지. 다르게 생각하면 그동안 내가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지만 인정하기는 싫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낑낑대며 치웠다. 그리고 깨끗해진 집을 두고 떠났다.



돌아온 날 유튜브에서는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청소하는 방법에 대한 쇼츠가 떴다(가끔 유튜브쇼츠 안에 몰래카메라가 들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때가 있다. 남편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안다.)


쇼츠의 제목은 매일 다른 집을 청소하는 사람. 이런 느낌이었다. 예쁘고 단정한 여자가(청소 잘하는 사람은 외모도 뛰어나다. 그냥 내 생각이다. 아니면 망고다. ) 나와 행동하는 것을 보여주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에 돌아오면 다른 사람의 집을 치운다는 마음으로 십 분동 안 부지런히 정리한다. 창문을 열어 먼지를 날리고, 아이들이 어질러놓은 물건들을 제 자리에 놓는다.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면 십 분만에 집은 깔끔해진다. 그다음 운동을 하든 자기 시간을 갖는다.


지금 내게 딱 필요한 영상이었다. 그리고 당장 결심했다. (나는 포기와 결심을 무척 빨리, 그리고 자주 하는 편이다)


수요일부터 오늘까지 5일 동안 나는 외출 전에 청소와 설거지를 완벽하게 끝냈다. 평소 같으면 청소하다 말고 핸드폰을 보거나 유튜브 영상을 찾느라 낭비했을 시간을 없앴다. 남의 집을 청소한다고 생각하니 핸드폰 볼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잡생각 없이 오로지 치우고 정리만 했다. 그랬더니 정말이지 십 분 만에 청소가 끝났다.


남편에게 그 말을 했더니 자기가 이십 년 동안 말했던 게 바로 그거라고 했다. 참 얄밉게도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혼자 뿌듯하다. 아침을 바쁘게 움직였더니 내 시간이 생겼다.


그동안 나는 집안일을 몰아서 했다. 그래서 한번 하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루종일 청소하고 치운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화가 났다. 일은 많고, 도와주는 사람은 없는데, 빨리 끝내야 나도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하는 여러 가지 마음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런데 한번 치우고 나서 매일 청소하기 시작하자 점점 청소시간이 짧아졌다.

유레카.

그걸 이제야 알았냐? 전업주부 맞냐? 당연한 소리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느냐고 해도 괜찮다. 나는 이것만 해도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고, 뭔가 깨달은 것 같기 때문이다. 거북이의 한 발짝처럼 느리고 티도 안 나지만 어쨌든 나는 조금 아주 조금 달라졌다. 그것만 해도 어딘가. 평생 제자리걸음만 하다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중요한 건 뭔가를 자꾸 깨닫는다는 것. 그리고 변화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어제와 다른 사람입니까? 같은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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